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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전쟁에 얽힌 화약 이야기

중국 몽고군의 원정 크레시 전쟁 오스만 터키
희랍의 불 아랍지역의 화약 후쓰파 전쟁 영국과 스페인
화약발명가 베르돌드 슈발츠

유럽 일부에서는 흑색화약의 경우처럼 화포의 발명 경위나 발명자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들이 화포를 발명하였다고 믿는 베르톨드 슈발츠(Berthold Schwarz)의 연고지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베르톨드 슈발츠는 흑색화약과 대포를 발명했다는 전설적 기록 외에는 본명마저 확인되지 않는 의문의 인물이다. 그가 14세기 경의 독일인이며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파에 소속된 수도승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출생이나 사망을 포함해 생애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가 발명하였다는 흑색화약의 조성이나 대포의 사양에 관한 자료도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그가 만들었다는 흑색 화약과 화포가 실전에서 사용됐다는 점은 정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1346년 영국-프랑스의 크레시(Crecy) 전쟁에서 화포가 최초로 사용됐다. 이 전쟁은 영국의 에드워드3세가 왕권을 확립한 다음 세력권의 확대를 위해 유럽 본토의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일어났다. 군사적 측면에서 남달리 특출했던 에드워드 3세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제도의 정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제일 먼저 화포의 실용화에 착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가장 강력한 무기로 평가되던 석궁보다 더욱 치명적인 장궁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가 제작한 화포의 규격이나 용법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고 진유로 만든 목이 좁고 긴 화병과 같은 모양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이 화포는 조작이 불편하고 성능 또한 우수하지는 않았으나 크레시 전쟁에 투입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화약병기가 되었다. 초기 발사물은 고대 아라비아의 대나무 화창과 유사한 화살이었지만 곧바로 둥근 석탄으로 개량되었으며 훨씬 나중에는 철탄까지 등장하였다.

에드워드 3세를 승리로 이끈 화포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쟁에서 11,000명의 장궁병, 5,000명의 창병, 3,900명의 기병 및 2문의 화포를 동원하였다. 노르망디를 지나서 파리 문전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진군한 영국군은 크레시 부근의 유리한 고지에 포진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스의 필립(Philip)왕은 봉건시대의 전통적 전쟁 양식에 따라 스스로 군대를 지휘하여 응전하겠다는 뜻을 에드워드 3세에게 미리 통보했다. 필립왕은 12,000명의 기병, 6,000명의 제노아 출신 석궁병 등 60,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군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출전하였다. 마침내 1346년 8월 26일 오후 영국군의 200보 전방에서 제노아 석궁병의 선공으로 격렬한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 싸움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장궁과 화포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접전이 있었으나 전세의 변화는 없었다.

이 때 프랑스군에서는 1,542명의 영주와 기사, 수천 명의 석궁병 그리고 무수한 보병이 전사하였지만 영국군은 2명의 기사를 포함한 100명 미만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크레시 전쟁에서 에드워드 3세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화포의 효과도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사용된 화포는 가축이나 사람이 끄는 썰매에 설치돼 있어 수송이 큰 문제였다. 그리고 발사 준비를 위한 화약의 장전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명중률이 매우 낮아서 특정 목표물을 겨눌 수 없었다. 게다가 크레시 전쟁에서는 대부분의 화약이 습기를 먹어 목표 거리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살상 효과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화포에서 나오는 화염과 뇌성은 화포를 처음 보는 프랑스 군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으며 전세의 향방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비록 흑색화약과 화포는 불완전한 상태였지만 새로운 무기로 등장했고 이 전쟁을 계기로 화약무기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급격히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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