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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전쟁에 얽힌 화약 이야기

중국 몽고군의 원정 크레시 전쟁 오스만 터키
희랍의 불 아랍지역의 화약 후쓰파 전쟁 영국과 스페인
헨리8세

크레시 전쟁에서 가장 먼저 화포를 사용해 유럽을 놀라게 했던 영국은 해상 화기의 활용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영국의 헨리 8세(1492-1587)는 해상 제패라는 웅대한 꿈을 품고 장거리 화포로 무장한 현대적 해군을 창설하고 이에 맞는 해상 전술 양식을 개발하였다. 헨리 8세는 대영제국의 기반을 하려면 바다 건너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 해야 할 뿐 아니라 영국보다 식민지 개척에서 한 발 앞서 있는 스페인을 제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함대를 능가하는 해군력을 구축해야만 했다. 헨리 8세는 스페인이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서양을 지배하고는 있지만 스페인 함대의 화약 병기 체계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당시의 스페인 해군이 세계 제일의 무적함대인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주력선은 3,4층의 갑판을 가진 겔리온(Gellyon)선이었다. 한 때 아메리카에서 수탈한 황금을 나르는 보물선으로 통했던 이 배는 떠 있는 요새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지만 선상의 무장은 의외로 빈약하였다. 주로 방어용 화포만이 설치되어 있었고 칼이나 창 또는 심지를 써서 점화하는 화승총을 휴대한 전투원이 승선한 정도였다.

이들이 무장한 화승총은 1521년에 처음 발명된 보병용 화기로, 구경 18mm, 최대 사거리 300m, 유효사거리는 100m 수준이었다. 훗날 격발식 머스케트(Musket) 소총이 등장할 때까지 상당 기간 애용된 이 총은 소화기 발전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기준에서 볼 때 함상의 기본 장비로는 매우 부적합했는데도 스페인 해군은 화포보다 화승총에 치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 함대의 전술양식은 원거리 포격전이 아니라 적선에 접근한 다음 전투원들이 적선이나 적병을 사로잡는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헨리 8세는 화약병기가 등장한 만큼 해상의 전술 개념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함간의 전투에서는 사정 거리가 먼 원거리에서 포격하여 격침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포격과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함상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화포술이나 항해술에 익숙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전술 개념은 전통적 해전양식에 얽매어 있던 스페인이나 다른 나라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최강의 함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1547년 그가 승하할 때 영국 해군은 53척의 전함에 2,085문의 함포로 무장한 최신의 대함대로 급성장해 있었다.그러나 헨리 8세가 영국에 남긴 것은 전함과 함포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공업을 항구적인 산업으로 성장시켰고 그의 지시로 화약을 만들던 화약공장은 고전적인 연금술사들을 최신 기술을 익힌 화학자들로 변신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그렇게도 염원하던 함포에 의한 해상 제패의 꿈을 딸인 엘리자베스1세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과 결혼한 몸"답게 조국의 영광을 위해 일한 독신 여왕이었다. 그녀는 왕실 함대가 비록 자신 소유의 사설군대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번영과 방위를 위해 즉시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부왕의 함대는 오랫동안의 관리 소홀로 부실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 경비를 절약하고 왕실 소유의 일부 영지를 팔아 재건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함대에서 필요한 화약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런던 근교의 월섬 애비(Waltham Abbey)에 새로운 공장까지 함께 건설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 함대의 전력이 갖추어질 무렵인 1587년에 드디어 화포로 무장한 전함의 위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다가왔다. 당시 스페인은 헨리 8세가 자기들 혈통의 캐더린 왕비를 축출한 일로 원한을 갖고 있었으며 보물선의 잦은 해상 피탈에도 종지부를 찍고 싶어했다. 이에 따라 필립 2세는 교황에 등을 돌리고 있는 영국을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 최강으로 자부하는 무적함대를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스페인의 대서양연안에 위치한 카디즈(Cadiz)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전함을 집결하고 언제라도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1587년 4월 어느날 새벽에 난데없는 함포의 일제 사격과 함께 정박 중이던 스페인 전함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침몰했다. 영국 함대의 선제공격에 의해 바다를 주름잡던 스페인 함대가 삽시간에 지리멸렬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싸움에서 스페인이 수천톤의 전함을 잃은 데 반해 영국 측 전함은 약간의 총상을 당했을 뿐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영국이 이렇게 엄청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기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화력과 기동력에 바탕을 둔 영국 해군의 새로운 전술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이듬해인 1588년 초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재건된 함대를 영국 해협으로 발진시켰다. 이 때 동원된 스페인 전함은 대소 함정을 모두 합해 무려 132척 이었으며 22,000명의 전투원과 8000명의 승무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해안에 접근하던 무렵인 7월 영국의 남서부 연안에 위치한 플리머스항에는 40척의 전함과 차출된 150척의 상선에 화포를 설치한 영국의 함대가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조만간 나타날 스페인 함대의 침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마침내 육중한 겔리온 선을 앞세운 스페인함대가 플리머스 외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단 한 척의 영국 전함도 보이지 않자 스페인 함대는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면서 해안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숨어 있던 영국 함대가 일제히 포문을 열면서 사상 최대의 함포전이 개시되었다. 물론 방위용 화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전함의 사정 거리 밖에서 영국의 전함이 일방적으로 발사하는 원거리 포격전이였다. 싸움도 해보지 못한 스페인 전함들은 차례로 수장되었으며 전날에 있었던 카디즈해전이 다시 재연됐다.

이 싸움에서 영국의 전함은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은 반면 필립의 스페인함대는 반수가 안 되는 배만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에서 더 이상의 식민지를 개척하지 못하고 해상의 왕좌마저 영국에게 양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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