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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화약 인물전

현대 로켓의 대부 고다드

로켓의 역사는 13세기의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의 로켓은 미국의 물리학자인 고다드에서 시작됐다. 고다드(Robert H. Goddard, 1882-1945년)는 매사추세츠주의 우스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스턴에서 보냈다. 그는 원래 신체가 약하고 자주 병을 앓았기 때문에 공상과 사색을 즐겼다. 벌써 이 시기에 그는 사람이 우주 속을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별에 갈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환상가 만은 아니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의 클라크대학교(Clark University, 1904-1908년)에서 로켓개발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물리학과 수학 등을 공부하였다. 여기서 그는 졸업하기도 전인 1907년에 핵로켓의 현실성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수준으로는 너무 어려웠고 엉뚱한 발상에 속하였기 때문에 연구내용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1년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1914년부터 모교인 클라크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9-1943년까지는 여기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로켓개발에 관한 어린 시절의 꿈을 하나씩 실현시켜 나갔다. 먼저 졸업과 동시에 로켓에 관련되는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909년에는 이미 다단식 로켓, 액체추진제에 의한 연속 로켓추진 지구와 다른 행성 사이를 왕복할 수 있는 유인 또는 무인 탐사 로켓 등을 구체적으로 구상하였다. 그리고 1914-1916년에 로켓비행의 기초 이론을 세우고 조그마한 고체 연료 로켓으로 실험까지 했다. 그는 실험 결과를 "최고의 고도에 도달하는 방법(A Method of Reaching Extreme Altitudes)이라는 짧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우주로 가는 방법은 로켓 부스터(Booster)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논문을 준비하는 비용은 모두 스미소니언연구소(Smithonian Institute)가 지원했으며 나중에는 출판까지 맡아주었다.

1920년대 고다드에게 초기에 큰 전환점이 나타났다. 그동안 로켓은 화약으로만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대체로 화약추진제는 불안전하였을 뿐 아니라 성능이 약해 우주선의 무거운 하중을 추진하는 데는 실용적이 못 되었다.

그래서 고다드는 새로운 연료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액체 연료를 사용해 보겠다는 발상을 하게 된다. 그는 두 개의 연료 탱크를 만들어 하나는 가솔린, 또 하나는 액체 산소로 채운다는 생각을 하였다. 만약 이 두 물질이 특별히 보강된 연소실에서 혼합되어 점화되면 혼합물이 연소되어 생기는 가스의 팽창에 의해서 강력한 추진력이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 이윽고 1923년 스미소니언의 지원으로 액체 연료 추진제의 정적(淨的) 시험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1926년에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그의 아주머니의 농장 들판에서 처음으로 액체 추진 로켓을 시험하였다. 이 시험에서 사용한 발사체는 중간 크기의 수도관으로 간단히 제작한 것이었다. 로켓 자체는 높이가 약 4피트, 지름이 6인치였다. 이것을 점화시키기 위하여 고다드는 긴 수도관 끈에 불꽃을 불어넣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 시험은 보잘것없는 결과로 끝났지만 착상만은 성공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1929년에는 스미소니언의 지원을 계속 받으면서 다시 실험을 했다.

이때는 기압계와 온도계 및 작은 카메라를 부착한 비교적 규모가 큰 로켓을 발사했다. 그러나 고다드의 선구적인 로켓 연구는 손꼽을 정도의 선각자들만이 인정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괴벽한 과학자로 생각하였으며 시끄러운 실험에 놀라기만 하였다. 그가 로켓의 발사에 성공하였을 때는 대중의 아우성이 빗발쳐 주립경찰은 실험 중단을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비행사인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고다드의 착상에 흥미를 갖게 돼 계속해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얻어다 주었다. 그리고 뉴 멕시코주의 사막 가운데서 고다드가 새로운 연소방법과 로켓의 경로를 조정하는 아주 정교한 유도장치에 관한 설계와 시험을 하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여기서 고다드는 고통스런 연구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나 이 같은 실험과정을 거치면서 1935년에는 8,000 피트의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는 로켓을 개발했으며 음속보다 빠른 속도도 얻을 수 있었다.그리고 1년 후에는 "액체추진제 로켓의 개발(Liquid Propellant-Rocket Development)"이라는 저서로 그의 연구를 정리하였다. 완전히 고립된 사막에서 혼자 연구하면서 근대적인 로켓의 기본사항에 관련된 기술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 정부는 고다드의 연구를 무시했으며 로켓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에 관해서도 인식하지 못했다. 1940년대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이 V-2 로켓을 개발하기 위해 방대한 자금을 지원받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대전 중에도 미국 정부는 로켓연구에 착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로켓의 개척자인 고다드를 항공모함의 갑판에 이륙하는 항공기의 이륙을 돕는 소형 부스터(Booster)의 개발에 차출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1945년 연합군이 승리하고 독일의 로켓 기지인 페네뮨데(Peenemuende)에 진입했을 때야 비로소 미국은 로켓의 위력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로켓에 대한 그의 업적은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고 미국의 가장 훌륭한 로켓 전문가인 그는 발티모어 병원에서 인후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다드 자신도 로켓은 전쟁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우주의 개척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고다드는 로켓 개발 사상 최초로 액체 추진 방법을 실험적으로 성공시킨 사람이었다. 그리고 액체 로켓에 관한 연구 중에는 음속보다 빠른 속도를 얻었으며 로켓을 자이로스코프(Gyroscope)로 안정시키는 방법도 개발했다. 그는 추진제 펌프, 변속성-추진기관, 역추진 로켓(Retro-rocket) 그리고 다단식 로켓기술에 관련해 213편의 특허를 남겼다.

1930년대에는 고다드가 로켓술을 주도적으로 연구하였지만 다른 몇 사람들도 부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행성간협회(The American Interplanetary Society, AIS)는 1930년대 초에 이미 액체 추진제를 실험하고 있었다. 이 협회는 주로 로켓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되었지만 상당히 유능한 과학자들도 일부 참여하고 있었다. 실례로 로켓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로켓의 벽을 냉각시키는 방법을 개발한 윌드(James H. Wyld) 등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로켓벽을 이중으로 만들어 내벽이 높은 연소열에 의해 녹기 전에 연료가 그 사이를 신속히 통과하도록 설계했다. 즉 연료는 빠르게 수송되면서 비점(沸点)까지 이르며 연료 분산기에 도달해서 쉽게 증발되어 연소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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