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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의 실용화에 앞섰던 브라운

고다아드 같은 선구적인 과학자들에 의해서 로켓기술이 외롭게 개발되고 있을 때 독일에서도 일단의 과학자들이 열심히 액체 로켓을 연구하고 있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1912-1974년)이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일 대실업가의 아들로 스위스의 취리히(Zurich)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뒤 베를린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930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이미 우주 비행의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우주 비행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이 분야에 관한 많은 연구를 하였다.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자 그는 독일우주비행협회의 창립 회원이 되었는데 그 협회는 로켓공학에 관한 지식을 서로 교환하는 열광적인 아마추어들의 집단이었다.

이 협회는 설립된 지 2년 만에 80여개의 로켓을 시험 발사했는데 최고 고도가 1마일까지 도달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1932년 경에는 독일육군이 이들 아마추어 로켓 제작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독일 정부는 로켓개발에 수백만불의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사업의 규모는 미국의 맨해튼계획(Manhattan Project)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육군은 로켓연구센터를 확장할 것을 제의하였다. 언젠가는 로켓 추진 폭탄이 유럽을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진 히틀러는 이 계획을 즉시 승인하고 원래의 쿰머스돌프베스트(Kummersdorf-West)에서 발틱해안의 어촌인 페너뮌데(Peenemuen-de)로 연구센터를 이전하면서 확대 개편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서는 군사용 이외의 로켓 연구는 일체 금지되었고 제2차대전 중 한 때는 20,000여명의 인원이 종사할 정도의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브라운은 여기에 최초로 모집된 기술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는 1930년대 후반과 전쟁 중에 적극적으로 로켓엔진의 개발을 지휘하였다.그 중 브라운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V-2라는 최초의 실제 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는 200여 마일 밖의 표적까지 1,600파운드의 폭약탄두를 나를 수 있었으며 초속 1마일의 초음속으로 비행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이것의 접근을 미리 경보해 줄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V-2는 발사대가 필요 없으며 일단 발사되면 자동조종에 의한 고정궤도를 유지한다.

이렇게 개발된 V-2는 2차 대전 중 네덜란드의 해안에서 영국으로 발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다행히도 V-2는 늦게 완성되었기 때문에 전쟁에는 큰 도움이 못 되었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미군이 페네뮌데연구기지를 점령하였을 때 V-2의 대서양 횡단형의 개발계획을 <주피터 로켓>수립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어쨌든 V-2는 전쟁양식을 바꾸어 놓는 대변혁을 불러왔다. 오늘날의 탄도 로켓 유도탄과 인공위성 발사용 로켓은 모두가 V-2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브라운을 체포하였으며 V-2 관련 부품을 300여대 이상이나 새로이 건설한 뉴멕시코의 시험장인 화이트샌드(White Sand Proving Ground)로 선적하여 갔다. 그리고 브라운은 열렬한 나찌 당원이었음에도 미국정부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곧 미국 미사일 연구팀의 핵심자가 되었다.

1950년대 브라운은 미국의 로켓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대체로 V-2에 기초한 모방설계에 치중했지만 즉시 먼저 것보다 훨씬 우수한 발사 장치를 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대형 로켓의 발사 시험에 기존의 화이트샌드 시험장으로만 부족하게 되었고 1949년에는 플로리다주의 케이프케너베럴에 엄청난 시험장을 신설하게 되었다. 이윽고 브라운은 1958년 경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위성을 궤도에 쏴 올리는 주피터(Jupiter)라고 알려진 4단 로켓을 설계 제작하였다.

그러나 군사 로켓에 관해 많은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브라운이 실제로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유인 우주선의 가능성이었으며 언젠가 우주선으로 사람이 별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주피터 계획이 성공한 뒤 마침내 브라운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의회에서 최초의 민간인 우주기관인 국립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을 세우고 유인 우주선을 연구하는 일을 맡긴 것이다. 물론 최초로 임명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미국 제일의 로켓 기술자인 브라운이었다.

이어서 브라운은 머큐리(Mercury), 제미니(Gemini), 아폴로(Apollo) 등의 달착륙 임무 등 3개의 주요한 유인우주선 계획을 주도하였다. 그가 이룬 최대의 업적은 달착륙을 위한 전체 각본을 구상하고 웅장한 여행을 할 우주선을 발사하는 데 필요한 거대한 부스터를 설계한 것이었다.

달착륙에 관한 브라운의 착상은 대담하고도 복잡하였다. 그는 연료, 동력 및 생명유지 장치를 실은 보조 우주선과 사령선, 그리고 달착륙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절묘한 새로운 우주선을 생각해냈다. 브라운의 계획은 우주선을 달 궤도에 진입시키고 사령선과 보조우주선으로부터 달착륙선을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다. 즉 3명의 아폴로 승무원중 2명이 달착륙선을 조정해 달표면에 착륙시키고 우주 비행사가 귀환하려면 모선과 랑데부해 도킹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조 우주선과 사령선이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궤도 밖에서 점화되면 이 때 착륙선이 떨어져 나간다. 지구 대기권으로 진입하기 전에 승무원들은 보조우주선을 버리고 원추형의 사령선으로 다시 들어가는데 그 사령선은 태평양의 지정된 지역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의 기발한 착상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지구 궤도로 40톤이나 되는 우주선을 발사시킬 수 있는 로켓이 필요하였다. 이에 대한 브라운의 해답은 이전에 제작했던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부스터인 새턴 5호(Saturn Ⅴ)였다. 이 3단 로켓의 길이는 360피트 이상이나 되었고 무게는 3,000톤 정도였다.

이륙시에는 7,500,000파운드 이상이라는 놀라운 추진력을 냈으며 1초당 10톤 이상의 연료를 태웠다. 새턴은 부스터 기술에서 역사상 가장 훌륭한 것이었고 달착륙 계획의 지탱물이 되었다. 아폴로가 달로 비행하여 전세계의 톱기사를 장식하고 있을 때 브라운은 벌써 화성까지의 최초 비행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마어마한 설계를 제안했지만 NASA의 재정이 삭감되면서 계획은 취소됐다. 위성간 비행 임무를 다음 세대의 우주기술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브라운은 NASA에서 사임, 개인 기업체에서 일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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