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화기념관

화약 인물전

암스트롱과 비커스

▲ 윌리엄 암스트롱 (1810-1900)

대영 제국을 지지하던 무기제조 회사는 상당수에 이르지만 아무래도 암스트롱사와 비커스사를 빠뜨릴 수가 없다. 영국은 유럽의 열강 중에서 공업화에는 앞섰지만 대포류의 개량을 비롯한 병기제조 산업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나폴레옹전쟁(1796-1815년)이나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년)을 끝낸 19세기의 중엽까지도 몇 개의 무기 업체가 재래식병기를 생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크림전쟁을 통해서 자국 대포의 성능이 인접국에 비하여 취약하다는 사실을 안 영국 군부는 점차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영국의 무기 개량은 변호사이며 발명가인 암스트롱(William George Armstrong, 1810-1900년)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다. 암스트롱은 원래 변호사였으나 과학 실험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1845년 뉴캐슬(New Castle)항의 선적 작업용 특수 크레인을 제작하기 위한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크레인을 생산하면서 1850년에는 수력발전기를 발명하는 등 연구 개발에 노력하였다. 크림전쟁 중에 영국 정부가 그에게 러시아함대를 폭파시킬 수 있는 수중 기뢰의 개발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암스트롱은 영국군이 사용하는 무기의 허술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55년에는 주철과 청동으로 만들었던 종래의 대포를 개량하여 암스트롱포를 발명하였다. 대포의 파열압을 높이기 위한 강철제의 동체(胴體)에 금속링을 구워서 끼우고 포탄의 공기저항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끝이 뾰족한 유선형으로 개량한 것이 바로 암스트롱포였다. 이어 1858년에 새로운 장전장치가 부착된 암스트롱 소총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암스트롱은 이 같은 업적들 덕분에 1859년에는 왕립 울위치(Woolwich) 조병창장이 되었으며 동시에 공작의 작위도 수여받았다. 그리고 1863년에는 자신의 공장인 암스트롱사에 복귀하여 무기의 개발과 판매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출발한 암스트롱사는 독일의 무기회사인 크루프(Krupp)와 쌍벽을 이루면서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암스트롱의 무기를 수입하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근대화 초기 일본 해군의 전력 증강에는 암스트롱사의 역할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러일전쟁에 관한 암스트롱사측의 기록에는 "일본의 승리는 어떤 의미에서 암스트롱사의 승리이다"고 씌어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일본 해군이 1905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했을 때 암스트롱사의 전종업원들이 하루 동안의 특별 휴가를 얻어 축제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오늘날 굴지의 중공업사이며 무기회사인 비커스(Vickers Ltd.)는 제철업자인 비커스(Edward Vickers, 1804-1897년)가 설립했다. 원래 그는 소규모의 철공장을 인수하여 주물을 생산하였으며 공구류 및 줄 등을 제작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1867년에 15만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비커스 부자회사를 창업하고 영국군을 위한 무기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이 무렵 보불전쟁(1870-1871년)이 터지면서 1871년도에는 자본금 50만 파운드의 대회사로 성장하였다. 당시에 생산한 비커스의 주된 무기류는 장갑판과 군함이었는데 이들 무기는 대단히 명성을 떨쳤다.

사세의 신장과 함께 1888년에는 영국과 스웨덴의 합작사였던 노덴펠트(Nordenfelt, 잠수함과 수뢰의 제작사)를 흡수하였다. 이어서 1896년에는 맥심총포회사(Maxim 기관총 제작사)를 흡수하여 비커스 부자-맥심회사로 확장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도 조선사 등을 매수함으로써 세계적인 무기회사로 발전했다. 그리고 제1차 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비커스의 자본금은 525만 파운드에서 1232만 파운드로 크게 늘어났다. 전쟁 중에 비커스 사는 전함 4척, 순양함 3척, 잠수함 53척을 비롯하여 약 20만 톤의 함정을 판매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공기 5,500대, 중화포 2,328문 등을 공급함으로써 연합국 최대의 무기공급원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대전의 종전으로 무기수요가 격감하면서 영국의 2대 무기회사인 암스트롱 사와 비커스 사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위기에 직면한 비커스는 항공 산업 진출로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결국 상당한 연구를 거쳐 1924년에는 길이가 700피트나 되는 거대한 괴물항공기인 R-100과 R-101을 제작하여 영국 내에 취항시켰다. 항공기는 기차여행과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에 비커스사는 기사회생하는 듯 했다. 이에 고무된 비커스사는 1930년에 R-101의 항로를 인도까지 연장하였다. 그러나 이 항공기가 프랑스 상공에서 폭발하며 비커스의 꿈은 깨어졌다.

또한 암스트롱사의 경우에도 무기제조 사업이 봉쇄되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대규모의 삼림개발과 제지공장의 건설에 착수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래서 1924년에는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주요 군수회사의 파멸을 수수방관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큰 적자를 안은 채 국영화할 수도 없는 매우 곤란한 지경이었다. 결국 비커스 사와 암스트롱사의 통합을 강요하면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들 회사는 1927년에 통합되고 비커스-암스트롱사로 개명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비커스-암스트롱사는 독일의 크루프와 함께 세계적인 무기제조회사로 발전했다. 새 회사는 조선과 중기계공업을 주로 하면서 무기의 제조도 겸하였다.

그 결과 1930-1934년간의 총 매출액 중에서 항공 사업의 수입을 제외한 65%를 무기제조에 재투자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65년 이후 사명을 현재 비커스 사로 개명하고 무기 제조 외에도 조선과 각종 기계류의 생산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암스트롱전차 공장을 뉴캐슬에 설립하여 컴퓨터 등 정밀 장비를 갖춘 전차를 제작하여 수출하고 있다.

페이지 인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