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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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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무기상인 크루프 일가

현대사를 통해 명성을 날렸던 무기상인과 제조업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영국의 암스트롱, 미국의 맥심, 그리스의 자하로프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부터 활약하고 있는 독일의 크루프사 (Friedrich Krupp Aktiengesellschaft)와 이를 경영한 크루프 일가 역시 대표적인 무기상인이었다. 원래 크루프사는 1811년에 F. 크루프(1787-1826년)가 루르강의 북쪽 에센에서 작은 철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827년에 알프레드 크루프(Alfred Krupp, 1812-1887년)가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대변혁을 이룩하게 되었다. 14세의 알프레드는 아버지가 남긴 종업원 7명뿐인 영세 규모의 철공장을 세계적인 제강 및 무기제조 회사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알프레드도 처음에는 독일의 철광석을 제련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는 평범한 제강업자였다. 당시 크루프사의 주상품은 강철과 기차바퀴였으며 무기는 자사의 선전을 위해 만든 진열용 대포 몇 문 뿐이었다. 그러나 1842년 새로운 강철 제조법을 발명하면서 크루프사는 대포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크루프사의 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이 때문에 초반에는 수출에만 전념했다. 그때까지 크루프는 독일의 적성국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에 상당량의 대포를 팔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크루프 포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되면서 독일 정부의 주문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크루프의 사세는 급속히 신장되었으며 이내 "대포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무기상으로의 명성을 갖게 되었다. 결국 크루프사는 외국의 공인에 힘입어 자국인 프로이센의 군부에도 대량의 대포를 납품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간의 전쟁(1866)과 프로이센-프랑스간의 보불전쟁(1870-1871년)에서 프로이센은 크루프 포의 위력에 힘입어 대승하였다.

특히 이들 전쟁은 교전 쌍방 모두가 크루프제 대포를 사용함으로써 근대 무기 산업의 비정한 전통을 이루는 시발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보불전쟁 등에서 크루프의 포를 사용한 덕분에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 정부는 크루프와 결속을 강화한다. 특히 1874년에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크루프사는 정부와 더욱 강하게 밀착되었다. 그 뒤 약 60년간 알프레드의 재임 중에 크루프사는 대포, 장갑판, 차량 등이 망라되는 철강과 무기의 거대한 콘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재임하던 기간에 크루프사는 전세계에 23,000문의 대포를 판매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20,000명을 넘었다. 그리고 1일 생산능력은 포탄 1,000발, 차량 500대, 철도 레일 20,000개를 자랑하는 대기업이 되었다. 이와 같이 크루프의 사세가 급속히 성장한 배경에는 유럽열강들이 경쟁적으로 군비를 확충하던 시대적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더욱 직접적인 요인은 철저한 무기상인이었던 알프레드의 경영철학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근대 무기 상인의 선구자답게 상대를 가리지않으며 무기를 팔았다.

그리고 무기 판매를 위한 협상과 권모술수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회사의 경영에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는 크루프 왕국의 헌법이라고도 할 일반규정을 제정하여 종업원의 후생 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본래의 성격은 냉혹하고 탐욕스러웠을 뿐 아니라 시기심마저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동생들과도 사이가 소원해졌고 말년에는 부인까지 떠나버림으로써 죽을 때는 하인만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알프레드의 뒤를 이은 3대 F.A. 크루프와 4대 G. 크루프의 시대에는 대포나 철강 외에도 군함과 U-보트까지 건조하게 된다. 특히 1893년에 크루프사는 해군용 무기나 함정의 제조에 필수적인 새로운 장갑 철판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 장갑은 종래의 철판에 비하여 방탄효과가 우수하였기 때문에 경쟁사들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크루프사는 톤당 9파운드의 특허료를 얹어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1911년에는 크루프가 거래하는 나라가 52개국에 달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장거리포(베르타포) 등의 정예무기의 대량 생산으로 독일 군사력의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1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사용한 무기 중에도 크루프제, 또는 크루프의 특허품이 널리 사용된 사실은 유명하다. 연합국측의 주력함에 사용된 방탄용 철판이나 각종 포탄은 크루프사와 관련되는 제품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유트란트 전투에서는 양군 모두가 크루프제 신관이 부착된 포탄을 가지고 격렬하게 맞붙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1차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으로 크루프사의 무기 생산은 중단되는 운명을 맞았으며 공장설비도 철거됐다. 1933년에 크루프사는 히틀러의 정권을 지지하면서 각종 대포, 전차, 군함, 항공모함, 잠수함 등을 양산하여 독일의 재무장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제2차 대전 중인 1943년에 히틀러는 크루프 법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크루프 콘체른을 영원히 크루프 가문의 가업으로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이 제2차 대전에서 패전하자 크루프사는 일시 연합군의 관리 아래 있다가 서독의 재군비 계획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연불 플랜트 수출로 인한 자금 압박으로 1967년에는 경영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해 7월에는 A. 크루프가 사망하면서 크루프사는 약 150년간을 지속한 개인 기업의 형태를 폐지하고 조직을 개편하게 되었다. 그 후 1975년에는 세계 광공업체 중에서 상위 100대 기업에 랭크될 만큼 사세를 다시 만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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