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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전쟁에 얽힌 화약 이야기

중국 몽고군의 원정 크레시 전쟁 오스만 터키
희랍의 불 아랍지역의 화약 후쓰파 전쟁 영국과 스페인
11세기부터 본격적인 화약병기 등장

중국에서 화약을 사용한 병기로 추정되는 무기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당나라 말로 고증된다. 904년 당이 예장(豫章 지금의 강서성 남창)을 공격할 때 비기(飛機)와 비화(飛火)를 써서 용사문(龍沙問)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초기형 화전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940년에 기술된 허동의 호령경에는 '화포는 화약을 사용하는 포를 말하며 화구는 구상으로 만든 화약을 화전 끝에 가까이 묶은 다음에 인선(引線)으로 점화시키고 포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송사중(宋史中)의 병사에는 970년 풍계승(馮繼昇)이 조정에 화전법을 진언하였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또한 975년에는 송의 조송이 화포와 화전을 사용하여 남당을 멸망시켰다는 사료도 발견된다. 따라서 중국의 경우 10세기 초에 이미 화약병기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10세기 후반에는 실전에 사용될 정도로 위력이 향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격적인 화약병기의 등장은 11세기에 접어들면서라고 할 수 있다. 1040년 북송 조정은 변경(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에 화약공장을 건설했으며, 1045년에 쓰여진 <무경총요>는 화약의 배합을 비롯한 화전, 화구, 질려화구 및 독약연구의 구조에 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북송(960-1126년) 시대의 화기 관련기록을 미루어 볼 때 11세기말에는 화약과 화기에 관한 기술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금나라의 화약 병기

송대 이후에 중국의 맥을 이은 금과 몽고(10-13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발되었던 중요 화기와 화약 관련사항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송: 비기-비화(904년), 화포-화구(940년), 화포-화전(975년), 화려(火藜)(1000년), 화약공장 건설(1040년), 무경총요(1045년), 질려화구-독연화구(毒煙火毬)(1045년), 금병포(1130년), 화석포(1161년), 철화포 (1257년), 대화포(1277년)
  • 금: 화약공장 접수(1127년), 철화포(1221년), 진천뢰(1231년), 비화창(1232년)
  • 원: 화약공장 접수(1214년), 독화부-화전-화포(1220년), 화포(1234년), 독연화구(毒煙火毬)(1241년),철화포 화전-화창(1257년)

화약병기의 발전이 빨라지면서 화기가 전쟁 무기의 주력으로 등장하게 됐고 화기가 없는 경우에는 고전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금군은 1126년 북송의 수도인 변경을 포위했을 때 송의 증갈(曾竭)이 사용하는 화기, 화전 및 화포에 의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1130년에도 화기를 보유하지 못했던 금군이 합주(陜州·하남성 협진)를 공격했으나 남성의 이언산(李彦山)이 금병포를 사용하여 방어했다. 실제로 금은 이에 앞선 1127년에 북송의 수도를 점령했을 때 화약 공장과 이에 관련된 모든 기술을 인수했지만 화약 병기의 사용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221년에 남송의 잠주(호북성의 잠춘)를 공격할 때는 처음으로 철화포라는 작열성 화기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1231년에 몽고의 선뢰(雷旋)가 금의 하중부(河中府)(협서)를 공략하였을 때는 진천뢰로 퇴로를 막고 있는 몽고선을 파괴한 다음에 통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서 몽고군과 금군이 변경에서 쟁탈전을 벌이던 1232년에는 금군이 비화창(飛火槍)을 사용하였으며 다음해에 있었던 1233년의 남경 전투에서도 금군은 비화창을 써서 몽고군을 격파했다.

몽고군의 화약병기

한편 1234년에 남송과 연합해 금을 멸망시킨 몽고는 1214년 금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면서 화약공장을 접수하고 화약병기 관련된 기술과 기술자들을 몽고로 가져갔다. 그러나 초기의 몽고군은 화약 병기의 사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용맹성에만 의존하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몽고군도 유럽 쪽으로 진출할 때는 몇 가지 화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1219년에 있었던 서하(중앙아시아지역)의 오트라르(Ottrar)를 공격할 때 화약병기와 유사한 화공품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그리고 더욱 본격적인 화기는 1221년 넷사(Nessa)의 공략에 사용한 독화부, 화전, 화포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무렵 몽고군의 화기는 초기적인 형태로 실전에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몽고군이 중국 대륙을 침공할 때 사용한 화기는 금의 남경을 공략하던 1232년의 진천뢰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몽고군은 죽포로 석탄을 발사하여 성을 파괴하였으며 화포를 사용하여 성내를 불살랐다. 이어서 1234년에 채주(蔡州)(하남성의 여남)를 점령하고 1237년에 남송의 안풍(安豊)을 공격할 당시에도 각각 화포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몽고의 서정(西征)군은 1241년 폴란드의 발스타트(Wahlstadt)전에서 독약연구(毒藥煙毬)를 처음 사용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모라비아(지금의 슬로바키아)의 올뮈쯔(Olmuetz)성을 공략할 때에는 화전으로 사원을 불태웠으며 1258년 바그다드전에서는 진천뢰를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몽고의 재상인 백안(伯顔)이 1247년 남송의 사양(沙洋)을 공격할 때도 화포를 사용하여 공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몽고군의 계속적인 공략의 대상이 되었던 남송은 이종(理宗) 때인 1257년에도 월남(안서성)에서 북상한 몽고군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남송의 재상인 이증백은 정강(靜江)을 시찰하던 중 화약 병기가 대소철 화포 95문, 화전 95기 및 화창 105통뿐임을 알고 즉시 호북(湖北)의 형주(荊州)에서 보충시켰다. 당시 형주에는 1-2천문의 철화포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있었으며 양장(襄陽)과 종상(鐘詳)에는 철화포가 각각 1-2만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리고 1259년 남송의 수춘부(壽春府)에서 발사화기의 하나인 돌화창(突火槍)을 처음 발명했으며 1268년에는 몽고군에 의해 5년간이나 포위돼 있던 양양 등 호북성 선상에 설치한 화창으로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강이 함락되던 1277년에는 남송의 수장인 요령할(要玲轄)이 대화포에 점화시켜서 성벽을 파괴했으며 성 밖의 몽고병도 수없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이 밖에도 1264년 몽고·고려 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는 몽고군이 진천뢰와 동일한 것으로 추측되는 철포를 사용하였다고 일본의 문헌에서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고려나 중국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지만 당시에 몽고군이 사용하던 화약 병기의 수준으로 보아서 신뢰성이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1279년에 있었던 남송과 몽고의 마지막 결전지가 된 안산(岸山)에서는 양군이 서로 선상의 화포로 응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남송이 멸망하였다. 이처럼 동양에서 화약과 화기는 원(몽고)과 명 등에 의해서 더욱 발전했지만 화약 기술의 초기적인 바탕은 사실상 송·금·원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약 병기의 위력

몽고의 원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으며 무수한 문화재와 도시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세계사적 측면에서는 동서문화의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화약과 화약병기를 서방에 전한 사실은 화약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고군은 유럽이나 중동지역에 아직 화약의 개념조차 생성되지 않은 때에 화약병기를 사용함으로써 이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운 개국 초기에는 몽고 역시 화약 또는 화약병기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개국 초인 1205년 서하를 공략하기 시작할 무렵이나 금제국의 수도인 북경을 처음 공격하였을 때(1211-1215년)는 몽고군이 화약병기를 사용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화약병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던 금과의 싸움에서 화약병기의 위력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고도의 화약기술을 갖고 있던 남송을 공격할 때는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몽고군이었지만 수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북경 점령 후 화약 기술 전수

문헌상 몽고가 화약 기술을 최초로 전수 받은 때는 금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한 직후인 1214년 금이 보유하고 있던 화약 기술과 시설을 포함해 상당수의 기술자들을 몽고로 끌고 간 뒤라고 할 수 있다. 몽고군이 화약 병기와 유사한 화공 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싸움은 징기스칸이 서하의 오트라르 등을 공격하던 1219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221년 넷사(Nessa)를 공략할 때 사용한 화전, 화포가 본격적인 화약 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렵에 몽고군이 사용한 화기는 초기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전쟁에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1227년 징기스칸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한 오고다이(태종)나 맹거(Mangu, 헌종) 등이 서방 원정을 나설 무렵에는 화약 기술도 매우 향상됐다.

1241년 폴란드의 발스타드(Wahlstadt)를 공격할 때는 몽고군이 독약 연구(毒藥煙毬)를 사용했는데 이에 관해서 폴란드 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몽고군은 요술을 부려서 대기(大旗)를 흔들 때 X형의 머리에 입에서 연무(煙霧)를 토하는 괴물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참기가 어려웠으며 폴란드 병사가 이를 직시할 수 없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어서 같은 해에 있었던 모라비아(Moravia, 지금의 슬로바키아)의 올미쯔(Olmitz) 성을 공격할 때는 화전을 사용했다. 그 후인 1258년의 바그다드전에서 몽고군이 철병(鐵甁)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아랍의 역사서에 남아 있다. 이는 진천뢰와 철화포 종류로 추측되는데 몽고군이 화약을 충전한 폭탄을 처음 실전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군이 서방에 화약기술 보급

이처럼 몽고군의 서방원정은 화약병기를 실전에 사용해 화약기술이 서방에 이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화약의 위력은 물론 화약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중동이나 유럽 지역에 화약기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어쨌든 로저 베이컨이 흑색화약을 발명하였다는 1249년보다 조금 빠른 시기에 몽고는 이미 유럽의 인근 지역인 아라비아 등지에서 화약병기를 실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화약에 관한 지식이 서방에 처음 소개된 시기는 몽고군의 서정 이전이며 이와는 다른 경로도 있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몽고군의 서진보다 앞선 시기에 중동이나 유럽에서 화약을 제조하거나 실전에 사용한 기록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몽고군의 서정은 서방세계에 화약 기술의 전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화약의 위력을 실감케 했을 뿐만 아니라 화약병기 개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화약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화약발명가 베르돌드 슈바르츠

유럽 일부에서는 흑색화약의 경우처럼 화포의 발명 경위나 발명자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들이 화포를 발명하였다고 믿는 베르톨드 슈바르츠(Berthold Schwarz)의 연고지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베르톨드 슈바르츠는 흑색화약과 대포를 발명했다는 전설적 기록 외에는 본명마저 확인되지 않는 의문의 인물이다. 그가 14세기경의 독일인이며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파에 소속된 수도승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출생이나 사망을 포함해 생애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가 발명하였다는 흑색화약의 조성이나 대포의 사양에 관한 자료도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그가 만들었다는 흑색 화약과 화포가 실전에서 사용됐다는 점은 정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1346년 영국-프랑스의 크레시(Crecy) 전쟁에서 화포가 최초로 사용됐다. 이 전쟁은 영국의 에드워드3세가 왕권을 확립한 다음 세력권의 확대를 위해 유럽 본토의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일어났다. 군사적 측면에서 남달리 특출했던 에드워드 3세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제도의 정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제일 먼저 화포의 실용화에 착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가장 강력한 무기로 평가되던 석궁보다 더욱 치명적인 장궁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가 제작한 화포의 규격이나 용법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고 진유로 만든 목이 좁고 긴 화병과 같은 모양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이 화포는 조작이 불편하고 성능 또한 우수하지는 않았으나 크레시 전쟁에 투입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화약병기가 되었다. 초기 발사물은 고대 아라비아의 대나무 화창과 유사한 화살이었지만 곧바로 둥근 석탄으로 개량되었으며 훨씬 나중에는 철탄까지 등장하였다.

에드워드 3세를 승리로 이끈 화포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쟁에서 11,000명의 장궁병, 5,000명의 창병, 3,900명의 기병 및 2문의 화포를 동원하였다. 노르망디를 지나서 파리 문전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진군한 영국군은 크레시 부근의 유리한 고지에 포진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스의 필립(Philip)왕은 봉건시대의 전통적 전쟁 양식에 따라 스스로 군대를 지휘하여 응전하겠다는 뜻을 에드워드 3세에게 미리 통보했다. 필립왕은 12,000명의 기병, 6,000명의 제노아 출신 석궁병 등 60,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군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출전하였다. 마침내 1346년 8월 26일 오후 영국군의 200보 전방에서 제노아 석궁병의 선공으로 격렬한 전투가 개시되었다. 이 싸움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장궁과 화포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접전이 있었으나 전세의 변화는 없었다.

이 때 프랑스군에서는 1,542명의 영주와 기사, 수천 명의 석궁병 그리고 무수한 보병이 전사하였지만 영국군은 2명의 기사를 포함한 100명 미만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크레시 전쟁에서 에드워드 3세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화포의 효과도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사용된 화포는 가축이나 사람이 끄는 썰매에 설치돼 있어 수송이 큰 문제였다. 그리고 발사 준비를 위한 화약의 장전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명중률이 매우 낮아서 특정 목표물을 겨눌 수 없었다. 게다가 크레시 전쟁에서는 대부분의 화약이 습기를 먹어 목표 거리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살상 효과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화포에서 나오는 화염과 뇌성은 화포를 처음 보는 프랑스 군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으며 전세의 향방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비록 흑색화약과 화포는 불완전한 상태였지만 새로운 무기로 등장했고 이 전쟁을 계기로 화약무기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급격히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터키

오스만 터키(Osman Turk) 역시 화약병기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화약병기의 선구자였던 후쓰파가 몰락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53년 터키의 군주 모하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었다. 오래 전 희랍의 불을 사용하여 아랍군을 격퇴한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석축으로 요새화된 콘스탄티노플은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1420년 여름 지즈카는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프라하로 진군했다. 이 때 동원한 각종 화포는 역사상 최초로 네 바퀴 수레에 장치하였는데 이동할 때의 번거로움과 발사 시의 반동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모하메드 2세의 터키군은 사상 최대의 화포부대를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앞에서 공격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때 터키군이 동원한 화포는 대소 구경을 모두 합하면 69문에 달하였는데 이중 13문은 반톤 이상의 석탄을 발사할 수 있는 육중한 대포였다. 지금도 이스탄불의 터키 박물관에는 이 무렵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지름 46인치짜리 석탄 2개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석탄을 보면 당시 화포의 규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 투입된 바실리카(Bacilica)라는 대포는 '화약병기 사상 최대의 괴물'로 알려진 초대형 화포였다. 이를 적재했던 썰매는 60필의 황소가 끌어야했으며 이동 중에는 넘어지지 않도록 떠받치기 위해 200여명의 군인과 다수의 가축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200여명이 삽이나 괭이를 들고 도로를 정지하지 않으면 화포의 행렬이 지나갈 수 없었다. 또한 바실리카의 뒤에는 발사수가 비단으로 장식한 아랍산 말을 타고 따랐으므로 이 거대한 괴물의 행차는 언제나 일대 장관이었다. 드디어 전열이 갖추어진 4월 6일 해 뜰 무렵 모하메드 2세의 신호에 따라 수백 개의 북이 울리면서 80,000명의 터키 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난 5월 29일 터키군은 콘스탄티노플 성내로 진입했으며 모하메드 2세는 화포에 의한 승리를 맛볼 수 있었다.

이 때 사용한 소형 화포는 어느 정도의 연속 사격까지 가능하였지만 대형의 경우에는 발사 준비를 위해 2시간 이상이 걸릴 정도로 조작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싸움은 화약병기가 실용화되던 초기에 전개되었던 최초의 본격적 포격전이었으며 괴물스러운 대포의 뇌성과 섬광이 봉건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킨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신화속의 화약 병기들

유럽 등지에서 흑색화약의 효시로 생각하는 발화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적인 이야기나 기록들이 전해온다. 멀리는 기원전 1190년경에 있었던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군이 그리스 함대를 "꺼지지 않는 불"로 격파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BC 410-304년)경에는 스파르타 동맹군이 시라쿠사(Syracusa, 시실리) 등지의 싸움에서 소이제를 사용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황, 피치, 송진을 충전한 발사물을 투척기로 발사해 아테네 함대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고대의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소이제를 화공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간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다분히 신화적인 측면이 강하고 실재하였던 사실로 믿기에는 어려운 내용들이다.

그러나 기원 후 226년 로마제국의 알렉산더 6세는 메소포타미아에 침입한 페르시아군과의 전쟁에서 자동화(自動火)라고 부르는 화기를 사용하였다. 자동화는 생석회와 아스팔트의 혼합물을 충전한 환상용기에 소량의 물을 주입시켜 발화시키는 화기였다. 이때부터 로마군은 피치, 황, 송지, 나프타(Naphtha) 등의 가연제와 생석회를 혼합한 다양한 형태의 소이제를 여러 차례의 전쟁에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나무로 만든 적진의 성벽이나 적선에 접근하여 손으로 투척하는 방식이었다. 이어서 간단한 구조의 투척기가 등장하면서 얇은 철제 용기에 소이제를 충전한 다음 높은 이동식 포좌에서 적진으로 굴리거나 적선으로 발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비잔틴 제국을 지켜낸 '희랍의 불'

그 후 발화제는 조성이나 용법에서 많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7세기로 이어졌다. 이 무렵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돼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제국이 양립하고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7세기 중에 수차례에 걸쳐서 사라센군의 침공을 받으면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마저 공격을 받았다. 이 때 비잔틴제국의 왕이었던 콘스탄틴 4세(668-685년)의 영웅적인 항전과 '희랍의 불(Greek Fire)'이라는 새로운 화기 덕분에 수도만은 지켜낼 수 있었다. 이 때 사용한 희랍의 불은 아라비아 태생으로 비잔틴에 귀화한 칼리니코스(Kallinikos)가 종래의 소이제를 더욱 실용적으로 개량한 화공무기였다.

그는 원래 연금술과 건축 기술을 갖고 있던 기술자로 콘스탄틴의 요청에 따라 비밀리에 희랍의 불을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피치나 황과 같은 가연성 물질을 군사용 화공 목적에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된 일이지만 본격적인 화공무기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력도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오랜 고전 끝에 희랍의 불로 승리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병술가 레오(Leo, 717-741년)는 자신의 병서에서 당시의 전투 광경을 기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라센 함선을 향하여 방화용 관을 가설한 다음 희랍의 불을 발사하면 심한 연기를 뿜으면서 폭뢰와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희랍의 불은 발사된 상태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 연소했기 때문에 적선에 낙하하면 완전히 소각되었다. 또한 연소중인 희랍의 불은 통상적인 진화 방법처럼 물을 부어서는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레오는 발사식 외에도 적병의 면전에 손으로 투척하여 화상을 입히는 소형의 수동 사이폰(Kheirosiphones)식의 희랍의 불도 사용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희랍의 불'을 응요한 화공무기들

희랍의 불을 모방하거나 개량한 여러 가지 형태의 소이제를 화공무기로 사용한 기록들이 전해 온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전쟁의 당사국이었던 사라센군은 813년 내란이 터지자 희랍의 불과 비슷한 발화제를 사용해 바그다드 시가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904년 사라센군이 그리스를 공격하였을 때도 피치, 황, 생석회 등의 혼합물을 도자기통에 넣어서 투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11세기 십자군 원정 때 이슬람군은 니스(Nice)의 전투에서 피치와 유지탄을 사용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성벽에서는 발화제를 장착한 화전을 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비잔틴군이 941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한 러시아군에 대항해 나프타, 생석회, 황의 혼합물로 된 '바다의 불(Sea Fire)'이라는 발화성 액체를 관이나 사이폰(siphon)으로 발사해 러시아 함대를 소각시킨 기록도 전해온다.

'희랍의 불'의 요소

'희랍의 불'이나 다른 발화제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에 관한 당시의 자료는 발견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뒷날 희랍의 불에 관한 신비를 재조명하면서 배합성분이 일부 밝혀지게 된다. 희랍의 불에 대한 연구에서는 영국의 대과학자였던 로저 베이컨이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사료와 객관적 실험을 통해 '희랍의 불'은 연소성의 황이나 숯, 나프타나 피치, 타르(Tar)와 같은 석유계 화합물, 물을 가하면 맹렬히 끓으며 발화하는 생석회 그리고 단정하기 어려운 미지의 물질이 배합되어 있는 혼합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생석회를 배합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희랍의 불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영국의 하임 (H.W.L. Hime) 중령도 그의 저서(Gunpowder and Ammunition, 1904)에서 공감을 표한 바 있다.

어쨌든 생석회를 함유한 희랍의 불은 화염에 의해 쉽게 발화될 뿐 아니라 물을 부어도 생석회가 흡수하면서 발생되는 막대한 열 때문에 불이 붙는다. 따라서 연소 중인 희랍의 불을 끄려고 물을 부으면 더욱 격렬하게 연소될 뿐이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던 사라센군은 이런 원리를 전혀 알지 못했고, 상식에 따라 물로 진화하였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희랍의 불'에 들어간 미지의 성분

로저 베이컨은 희랍의 불에 배합된 미지의 한 성분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초석(질산칼륨, KNO3)이나 칠리초석(질산나트륨, NaNO3)이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 1250년경 마커스 그레커스(Marcus Graecus)가 저술한 처방집(Liber Igmium)에도 희랍의 불에는 초석이 배합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희랍의 불은 송진 1, 황 1 및 초석 6의 비율로 된 혼합물을 석유나 아마인유(亞麻仁油) 등에 분산시킨 니상(泥狀)물이다. 그러나 당시의 희랍이나 유럽에서 초석류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으며 희랍의 불에 초석이 포함됐는지에 관해서는 그 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됐었다. 희랍의 불에 초석이 들어 있었다면 이것은 사실상 흑색화약을 의미하며 따라서 희랍의 불은 발화제나 소이제라기보다는 폭발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재는 희랍의 불에는 초석류가 배합되어 있지 않으며 피치 같은 석유계 화합물 가연제에 생석회가 배합된 발화제라고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유럽지역에서 흑색화약이 실용화되기 얼마 전부터는 희랍의 불같은 발화제에도 초석이 부분적으로 배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견이 강하다. 왜냐하면 유럽 지역의 초석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는 아랍의 한 의약서에서 초석을 중국의 눈(Chinese Snow)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이 1200년을 전후에 발행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흑색화약이 제조된 13세기에는 초석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는 점도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어쨌든 오랫동안 사용됐던 희랍의 불은 유럽권에서 개발된 흑색화약의 원형에 속하는 소이제이며 로저 베이컨에 의해 흑색화약이 재발명되는 매개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코스탄티노플 패전으로 화공무기 등장

일반적으로 유럽 등지에서는 13세기에 흑색화약이 발명되어 14세기경부터 화포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랍의 경우 유럽보다 앞서서 흑색화약과 이를 이용한 화기를 전쟁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기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8세기경 아랍의 모든 주변지역을 석권한 강국인 사라센(Saracen)제국이 673년부터 678년까지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을 때만 해도 화약성 화기는 보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라센군이 긴 싸움에서 그리스군이 사용한 희랍의 불에 의해 고전을 하면서도 화공무기로 공격한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년 후인 683년 메카전에서는 시리아군이 소이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사라센 제국의 분열로 내전 중이던 813년에는 적군이 발사한 화기에 의해 바그다드 시가지가 불타버렸다는 자료가 있다. 그리고 904년 사라센이 살로니카(Salonika)를 공격했을 때는 소이제 가루가 충전된 도자기를 투사하였다. 이것은 피치, 송지, 석회석이 배합된 혼합물로 사실상 희랍의 불과 같은 성분이며 이를 뒤집어쓴 병사들은 질식하였다. 이처럼 장기간 동안 사용되지 않던 화공무기가 아랍 지역에서 다시 사용된 배경에는 사라센의 콘스탄티노플 패전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화공무기의 실용성을 깨달은 아랍에서 이를 다시 개발했거나 희랍의 불을 모방하여 전쟁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십자군의 1차 원정 때의 니스전(1096-1099년)에서도 사라센군은 피치와 유지탄(油脂彈)을 사용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성벽에서는 피치, 황, 마(麻)조각 등을 붙인 화살에 불을 붙여 쏘았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서 패전한 직후부터 압바스(750-1218년) 왕조의 사라센군에는 석유투척부대(Nafftum)가 편성돼 점화된 석유를 적진에 방사하였는데 부대원들은 방화복을 착용했다는 기록도 전해 온다.

몽고군과 화약 정보

아랍지역에서 최초로 화약병기가 사용된 것은 1219년 몽고의 서방 원정 당시 1차 목표가 됐던 중앙아시아 지방의 호라즘을 공격할 때였다. 그리고 1258년 몽고군이 바그다드를 침공할 때 철병이라는 진천뢰를 사용하면서 아랍권은 본격적인 화약 병기와 접촉하게 된다. 당시까지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랍지역도 화약이나 화기에 관해 알지 못하다가 전쟁을 통해 비로소 화약기술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몽고군의 침입 이전에도 뢰화나 '희랍의 불'과 같은 화약성 전쟁무기가 사용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들이 화약류에 속한다는 사료 는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일부 기록에 의하면 1147년에도 아랍인이 스페인의 이베리아에 대해 화기를 사용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몽고의 침공 이후 몽고군의 화기를 모방해 제조한 화약병기들이 아랍 지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13-14세기경에 쓰인 아랍의 병서들에는 몽고를 지칭하는 계단화창(契丹火槍)과 계단화전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 중 1285-1295년(일설에는 1280년) 사이에 시리아의 최고 병술가였던 알핫산 알라마(Al-Hassan Al-Rammaeh)가 쓴 병서가 가장 대표적인 자료로 꼽히는데, 이 책에는 "스스로 날면서 연소하는 달걀(Self-moving and combusting egg)"에 관한 그림과 해설이 실려 있다. 초기형 로켓의 일종인 '연소하는 달걀'은 2개의 냄비를 포개놓은 구조로 뒤쪽에 꼬리 같은 2개의 긴 막대를 달아 비행 중 궤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이 무기는 몽고군이 사용하였던 비화창을 모방하여 아랍에서 만든 최초의 로켓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지금 소련의 레닌그라드 박물관에 있는 마드파(Madfa)의 그림에서도 몽고군의 화기를 모방한 사실이 확인된다. 마드파라는 화기는 외경 17cm, 내경 15cm, 길이 30cm 정도인 원통에 화약을 넣고 통구에 석구나 철구와 같은 탄환을 장입한 형태이다. 사용하는 탄환의 지름은 약 15cm이며 장약하는 화약량은 5kg 정도로 이것을 발사통에 장전한 다음 점화한다고 아랍의 병서에 기록돼 있다. 그리고 마드파는 짧은 발사통에 석구를 사용하는 제1종과 장통에 철구 또는 철병을 발사하는 제2종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철병이 몽고군이 사용한 진천뢰를 모방하여 만든 폭탄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수준의 화약 병기는 사실상 오늘날의 화포와 동일한 구조로 화약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무어인의 화약 사용기록

한편 몽고군의 침공을 받던 기간에 해당되는 1259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이 스페인의 니브라(Nibra)에서 투사기로 오물과 돌을 발사했는데 이 때 뢰화를 동반하는 발사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모로코의 메릴라(Melilla)전에서도 무어인이 가농포(Cannon)와 함께 화기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확실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이에 관해 일부에서는 일종의 소이제를 노포(弩砲)로 쏘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밖에도 아랍인이 '불타는 석탄'(Firing Stone)을 사용하였다는 기록도 전해 온다.

이처럼 아랍에서도 14-15세기경에는 유럽과 보조를 같이 하며 본격적으로 각종 화약병기를 여러 전쟁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료들을 살펴보면 아랍 지역이 유럽보다 앞서 화약병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랍지역이 유럽보다 문화와 과학 수준이 앞섰던 까닭도 있지만 화약의 발상지인 중국과 이전부터 교역을 해온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랍은 일찍부터 해상을 통해 중국과 문물교류를 해왔으며 특히 13세기에는 남송과 거래가 매우 활발하였다. 이 때문에 남송의 광주나 호주 등지에는 아랍인을 위한 거류지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중국의 화약기술이나 연화가 수입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248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사망한 이븐 알바이타르(Ibn al Baythar) 가 자신의 의서에서 흑색화약의 주원료인 초석을 '중국의 눈(Chinese Snow)'이라고 소개하면서 제조법까지 설명한 것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보헤미아의 폭동을 이끈 후쓰파

유럽에서 최초로 화포를 사용했던 크레시 전쟁이 끝나면서 화약병기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던 중 화약과 병기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군사적 기적이 중부 유럽의 보헤미아에서 일어났다. 1400년경 독일의 지배를 받는 봉건영지였던 보헤미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독일의 지배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민들의 지지를 받던 존 후스(John Huss)가 봉건 학정을 성토하였다는 죄로 처형되자 격렬한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 폭동을 주도했던 후쓰파는 화약기술을 익히 알고 있었던 잔 지즈카(Jan Zizka)의 지휘 아래 독일과 전쟁을 준비했다.

드디어 1420년 여름 지즈카는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프라하로 진군했다. 이 때 동원한 각종 화포는 역사상 최초로 네 바퀴 수레에 장치하였는데 이동할 때의 번거로움과 발사 시의 반동을 줄일 수 있었다. 후쓰파가 프라하에 도착한 직후 독일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황태자들을 보내 프라하를 포위했다.

이 때 독일군은 관례에 따라 갑옷을 입은 공작과 기사, 천민 출신의 보병, 고용된 화포병과 석궁수, 그리고 전리품을 탐내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모험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프라하를 수비하는 대항군 측은 일반 시민과 긴급히 고용된 자유 기업인, 7,000명 정도 뿐인 후쓰파가 전부였다. 7월 14일 독일군측은 봉건군대의 일반적인 전투방식에 따라 후쓰파들이 선점하고 있는 고지를 향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약기술 뿐만 아니라 전투 지휘에서도 탁월했던 지즈카는 치밀한 작전을 펼쳐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대패한 독일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2차 공격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프라하에서 철수했고 후쓰파도 원래의 근거지인 타보르로 돌아갔다.

지금도 프라하 교외에 있는 이 싸움터를 지즈코즈(Zizkoz)라 부르면서 지즈카와 농민들의 쾌거를 기념하고 있다. 금의환향한 후쓰파는 또 다시 색스니(Saxony), 바바리아(Bavaria),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독일의 영지를 마음대로 약탈하면서 다음 전쟁을 대비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에 독일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보헤미아 국경으로 200,000 대군을 파견하자 다시 일대 결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후쓰파의 병력도 40,000에 이를 정도로 크게 늘어나 예상보다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후쓰파는 50여회 이상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고 적어도 500개 이상의 성을 약탈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후쓰파가 연승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약병기로 무장한 전차가 자리 잡고 있지만 후쓰파 특유의 조직과 봉건영주들에 대한 적개심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화기개발붐

지즈카의 죽음 뒤에 일어난 내분 등으로 약화된 후쓰파는 1434년에 있었던 리파니(Lypany)전투에서 대패하면서 14년간의 긴 싸움을 끝냈다. 역사는 이 싸움을 후쓰파 전쟁(Hussite War)이라고 부르는데 화약사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 우선 전차의 개발이나 화포를 수레에 처음 장착하였다는 점에서 화기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천한 농노도 화기로 무장하면 칼을 찬 영주나 기사보다 강하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영국의 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흑색 화약이 모든 사람을 크게 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 후쓰파 전쟁은 화약병기의 보급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미 크레시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화기의 개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후쓰파 전쟁을 통해 화약병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 크레시 전쟁의 당사자였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화약병기의 개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소형 철관을 여러 개 묶어서 한 번의 점화로 모두 발사할 수 있는 다연장식 화기를 개발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서도 이를 응용함으로써 144개의 총열을 결합한 초대형 화약병기를 제작하였는데 이 무기는 동시에 12발식 12회 발사하는 다발식 화포였으며 4필의 말이 끌 정도로 육중했다. 이어서 1400년경에는 발사 시에 포신이 파열되지 않도록 철환대를 부착한 철제포가 등장하였으며 발사물로는 철탄이 사용되었다. 이 무렵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박보다 큰 철탄이 지금까지 벨기에의 겐트(Ghent)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무게가 10파운드 안팎인 휴대용 소화기까지 개발되었는데 발사체는 여러 개의 연구를 일시에 쏘는 연탄이었다.

헨리8세

크레시 전쟁에서 가장 먼저 화포를 사용해 유럽을 놀라게 했던 영국은 해상 화기의 활용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영국의 헨리 8세(1492-1587)는 해상 제패라는 웅대한 꿈을 품고 장거리 화포로 무장한 현대적 해군을 창설하고 이에 맞는 해상 전술 양식을 개발하였다. 헨리 8세는 대영제국의 기반을 하려면 바다 건너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해야 할 뿐 아니라 영국보다 식민지 개척에서 한 발 앞서 있는 스페인을 제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함대를 능가하는 해군력을 구축해야만 했다. 헨리 8세는 스페인이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서양을 지배하고는 있지만 스페인 함대의 화약 병기 체계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당시의 스페인 해군이 세계 제일의 무적함대인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주력선은 3,4층의 갑판을 가진 겔리온(Gellyon)선이었다. 한 때 아메리카에서 수탈한 황금을 나르는 보물선으로 통했던 이 배는 떠 있는 요새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지만 선상의 무장은 의외로 빈약하였다. 주로 방어용 화포만이 설치되어 있었고 칼이나 창 또는 심지를 써서 점화하는 화승총을 휴대한 전투원이 승선한 정도였다.

이들이 무장한 화승총은 1521년에 처음 발명된 보병용 화기로, 구경 18mm, 최대 사거리 300m, 유효사거리는 100m 수준이었다. 훗날 격발식 머스케트(Musket) 소총이 등장할 때까지 상당 기간 애용된 이 총은 소화기 발전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기준에서 볼 때 함상의 기본 장비로는 매우 부적합했는데도 스페인 해군은 화포보다 화승총에 치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 함대의 전술양식은 원거리 포격전이 아니라 적선에 접근한 다음 전투원들이 적선이나 적병을 사로잡는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헨리 8세는 화약병기가 등장한 만큼 해상의 전술 개념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함간의 전투에서는 사정거리가 먼 원거리에서 포격하여 격침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포격과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함상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화포술이나 항해술에 익숙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전술 개념은 전통적 해전양식에 얽매어 있던 스페인이나 다른 나라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최강의 함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1547년 그가 승하할 때 영국 해군은 53척의 전함에 2,085문의 함포로 무장한 최신의 대함대로 급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영국에 남긴 것은 전함과 함포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공업을 항구적인 산업으로 성장시켰고 그의 지시로 화약을 만들던 화약공장은 고전적인 연금술사들을 최신 기술을 익힌 화학자들로 변신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그렇게도 염원하던 함포에 의한 해상 제패의 꿈을 딸인 엘리자베스1세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과 결혼한 몸"답게 조국의 영광을 위해 일한 독신 여왕이었다. 그녀는 왕실 함대가 비록 자신 소유의 사설군대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번영과 방위를 위해 즉시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부왕의 함대는 오랫동안의 관리 소홀로 부실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 경비를 절약하고 왕실 소유의 일부 영지를 팔아 재건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함대에서 필요한 화약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런던 근교의 월섬 애비(Waltham Abbey)에 새로운 공장까지 함께 건설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 함대의 전력이 갖추어질 무렵인 1587년에 드디어 화포로 무장한 전함의 위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다가왔다. 당시 스페인은 헨리 8세가 자기들 혈통의 캐더린 왕비를 축출한 일로 원한을 갖고 있었으며 보물선의 잦은 해상 피탈에도 종지부를 찍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필립 2세는 교황에 등을 돌리고 있는 영국을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 최강으로 자부하는 무적함대를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스페인의 대서양연안에 위치한 카디즈(Cadiz)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전함을 집결하고 언제라도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1587년 4월 어느 날 새벽에 난데없는 함포의 일제 사격과 함께 정박 중이던 스페인 전함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침몰했다. 영국 함대의 선제공격에 의해 바다를 주름잡던 스페인 함대가 삽시간에 지리멸렬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싸움에서 스페인이 수천 톤의 전함을 잃은 데 반해 영국 측 전함은 약간의 총상을 당했을 뿐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영국이 이렇게 엄청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기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화력과 기동력에 바탕을 둔 영국 해군의 새로운 전술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이듬해인 1588년 초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재건된 함대를 영국 해협으로 발진시켰다. 이 때 동원된 스페인 전함은 대소 함정을 모두 합해 무려 132척 이었으며 22,000명의 전투원과 8000명의 승무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해안에 접근하던 무렵인 7월 영국의 남서부 연안에 위치한 플리머스항에는 40척의 전함과 차출된 150척의 상선에 화포를 설치한 영국의 함대가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조만간 나타날 스페인 함대의 침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마침내 육중한 겔리온 선을 앞세운 스페인함대가 플리머스 외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단 한 척의 영국 전함도 보이지 않자 스페인 함대는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면서 해안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숨어 있던 영국 함대가 일제히 포문을 열면서 사상 최대의 함포전이 개시되었다. 물론 방위용 화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전함의 사정거리 밖에서 영국의 전함이 일방적으로 발사하는 원거리 포격전이었다. 싸움도 해보지 못한 스페인 전함들은 차례로 수장되었으며 전날에 있었던 카디즈해전이 다시 재연됐다.

이 싸움에서 영국의 전함은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은 반면 필립의 스페인함대는 반수가 안 되는 배만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에서 더 이상의 식민지를 개척하지 못하고 해상의 왕좌마저 영국에게 양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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