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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전쟁에 얽힌 화약 이야기

중국 몽고군의 원정 크레시 전쟁 오스만 터키
희랍의 불 아랍지역의 화약 후쓰파 전쟁 영국과 스페인
화약 병기의 위력

몽고의 원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으며 무수한 문화재와 도시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세계사적 측면에서는 동서문화의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화약과 화약병기를 서방에 전한 사실은 화약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고군은 유럽이나 중동지역에 아직 화약의 개념조차 생성되지 않은 때에 화약병기를 사용함으로써 이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운 개국 초기에는 몽고 역시 화약 또는 화약병기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개국 초인 1205년 서하를 공략하기 시작할 무렵이나 금제국의 수도인 북경을 처음 공격하였을 때(1211-1215년)는 몽고군이 화약병기를 사용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화약병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던 금과의 싸움에서 화약병기의 위력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고도의 화약기술을 갖고 있던 남송을 공격할 때는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몽고군이었지만 수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북경 점령 후 화약 기술 전수

문헌상 몽고가 화약 기술을 최초로 전수 받은 때는 금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한 직후인 1214년 금이 보유하고 있던 화약 기술과 시설을 포함해 상당수의 기술자들을 몽고로 끌고 간 뒤라고 할 수 있다. 몽고군이 화약 병기와 유사한 화공 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싸움은 징기스칸이 서하의 오트라르 등을 공격하던 1219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221년 넷사(Nessa)를 공략할 때 사용한 화전, 화포가 본격적인 화약 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렵에 몽고군이 사용한 화기는 초기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전쟁에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1227년 징기스칸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한 오고다이(태종)나 맹거(Mangu, 헌종) 등이 서방 원정을 나설 무렵에는 화약 기술도 매우 향상됐다.

1241년 폴란드의 발스타드(Wahlstadt)를 공격할 때는 몽고군이 독약 연구(毒藥煙毬)를 사용했는데 이에 관해서 폴란드 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몽고군은 요술을 부려서 대기(大旗)를 흔들 때 X형의 머리에 입에서 연무(煙霧)를 토하는 괴물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참기가 어려웠으며 폴란드 병사가 이를 직시할 수 없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어서 같은 해에 있었던 모라비아(Moravia, 지금의 슬로바키아)의 올미쯔(Olmitz) 성을 공격할 때는 화전을 사용했다. 그 후인 1258년의 바그다드전에서 몽고군이 철병(鐵甁)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아랍의 역사서에 남아 있다. 이는 진천뢰와 철화포 종류로 추측되는데 몽고군이 화약을 충전한 폭탄을 처음 실전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군이 서방에 화약기술 보급

이처럼 몽고군의 서방원정은 화약병기를 실전에 사용해 화약기술이 서방에 이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화약의 위력은 물론 화약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중동이나 유럽 지역에 화약기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어쨌든 로저 베이컨이 흑색화약을 발명하였다는 1249년보다 조금 빠른 시기에 몽고는 이미 유럽의 인근 지역인 아라비아 등지에서 화약병기를 실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화약에 관한 지식이 서방에 처음 소개된 시기는 몽고군의 서정 이전이며 이와는 다른 경로도 있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몽고군의 서진보다 앞선 시기에 중동이나 유럽에서 화약을 제조하거나 실전에 사용한 기록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몽고군의 서정은 서방세계에 화약 기술의 전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화약의 위력을 실감케 했을 뿐만 아니라 화약병기 개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화약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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