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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최무선과 다이너마이트 김

  • 최무선
  • 다이너마이트 김
전란 중에 사수한 화약공장

▲ 1950년대 말 기술협력을 위해
일본화약주식회사 厚狹(아사)공장을
방문한 현암 김종희 회장
(오른쪽 세번째)

우리나라의 화약 공업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1952년 10월 9일 한국화약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였다. 한국화약의 창업주 현암 김종희 회장은 8·15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떠나자 조선화약공판을 지배인 자격으로 인수하게 됐다. 현암은 조선화약공판의 운영자로서 미 군정청 등을 상대로 판로를 개척하는 한편, 전후 한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화약의 가격을 해방 전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다. 현암은 6·25 전쟁 중에도 일신의 안위를 위해 피난을 가기보다는 화약고의 안전을 염려하여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내는 기지를 발휘했으며, 1.4 후퇴로 부산에 피난해서는 전란 속에서도 영업 활동을 수행하고자 화약이 실린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는 위험한 임무를 자임하는 등 화약 수급 활동에 전념했다.

인천화약공장 복구

1952년 휴전 회담이 진행되면서 정부 귀속 재산이던 조선화약공판이 민간에 매각된다는 소식을 듣고 응찰했고, 마침내 현암은 1952년 6월 12일 관재청에서 실시한 조선화약공판 매각 입찰에서 23억 4,568만원 에 낙찰, 운영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할 새로운 회사 법인이 필요해짐에 따라 1952년 10월 9일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의욕과 달리 당시 국내 기술로는 화약을 제조할 수가 없었고,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유지 인천화약공장(인천시 남구 고잔동 50번지)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현암 회장은 오로지 화약을 국산화해야겠다는 일념만으로 폐허가 된 공장을 복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가 인천공장 설계도를 구하여 정부에 방대한 복구 계획서를 제출했다 .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55년 6월 10일 한국화약에 조선유지 인천공장을 불하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지게 됐다.

현암은 1955년 10월 조선유지의 인천화약공장을 인수하고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1955년 9월부터 시작된 1차 복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가운데 같은 해 12월 24일 화입식을 가졌고 이듬해 2월에는 시험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험 생산된 제품의 품질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 상품화되지 못했다. 원인 분석과 여러 차례의 시험 생산을 거쳐 이듬해인 1956년 4월 국산 뇌관과 도화선 생산에 이어 최초의 국산 대량 생산 화약인 초안 폭약 생산에 성공했다.

노벨의 후예들

▲ ① 1955년 당시 인천화약 공장 정문 ② 한국 화약 초기 초화공실 ③ 한국화약에서 생산한 젤라틴 다이너마이트

현암의 꿈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보다 강력한 전천후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약 국산화로 가는 길이라 보고 여기에 사운을 걸다시피 했다. 이에 따라 3차에 걸친 복구계획의 진행과 함께 화약의 제조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연희전문 화학과를 나온 신현기 등 전문 기술진을 발굴하고 가장 위험한 작업인 초화공실 숙련공을 영입하기 위해 10-20만 환(당시 쌀 한 가마니 1만 4천환, 인천공장장 월급 3만 환)이란 엄청난 급료를 지불했다.

이같은 현암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다이너마이트 개발의 꿈은 무르익어갔다. 1958년 6월, 인천화약공장 초화공실에서 시행된 다이너마이트 (Nitro-glicerin) 시험 생산은 성공리에 수행됐고,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각 신문들은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의 개가’ 등의 제목을 달아 한국화약이 각고의 연구 노력 끝에 니트로글리세린 제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현암과 초화 작업반 3인의 얼굴을 노벨의 후예들이라며 크게 소개했다.

이는 한국 화약사에 있어 최무선의 화약 제조에 견줄 만한 뜻 깊은 개가로 현암 회장의 굳은 결의와 애국심, 직원들의 생명의 위험을 불사한 노력의 결과였다.

경제 개발의 돌파력 제공

▲ 이승만 대통령 인천공장 방문

한국화약은 다이너마이트의 자체 생산 기술을 확보한 후, 화약의 대량 생산 체제 구축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인천공장 3차 복구의 최종 공사인 글리세린 정제 공장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글리세린 공장이 준공되면서 생산 원가도 큰 폭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3차에 걸친 복구 공사가 완료된 시점에서 인천공장은 연간 다이너마이트 280여 톤, 암모나이트(초안 폭약) 780여 톤, 도화선 1,200만 미터, 공업 뇌관 1,000만 개, 전기 뇌관 100만 개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국제 규모의 대시설 용량을 갖추게 되어 60년대의 비약적 성장을 위한 기반 구축에 성공했다. 1961년 8월에 미군에 화약을 납품하게 된 것은, 한국화약이 제조하는 화약이 품질 면에 있어서나 가격 면에 있어서 일정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화약이 인천공장 복구 공사를 추진하고 있던 중에 5·16과 제3공화국 출범 등 정치적 변혁이 이어졌으나, 한국화약은 잇따른 대형 토목 공사 발주와 강력한 광산물 지원책에 따라 호황을 누리게 됐다. 특히 1964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한국화약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70년대 이후 고도 성장기에 한국화약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하며 경제 재건과 국토 개발에 기여하며 성장해 왔다. 현재, (주)한화의 화약부문은 산업용 화약, 방위 산업 분야에서의 기술력을 발판으로 화약 응용 분야인 발파해체, 인플레이터, 연화 사업 등은 물론 정밀 유도 무기 및 우주 항공 산업 등의 첨단미래 사업을 개척하며 관련 산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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