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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전쟁에 얽힌 화약 이야기

중국 몽고군의 원정 크레시 전쟁 오스만 터키
희랍의 불 아랍지역의 화약 후쓰파 전쟁 영국과 스페인
보헤미아의 폭동을 이끈 후쓰파

유럽에서 최초로 화포를 사용했던 크레시 전쟁이 끝나면서 화약병기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던 중 화약과 병기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군사적 기적이 중부 유럽의 보헤미아에서 일어났다. 1400년경 독일의 지배를 받는 봉건영지였던 보헤미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독일의 지배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민들의 지지를 받던 존 후스(John Huss)가 봉건 학정을 성토하였다는 죄로 처형되자 격렬한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 폭동을 주도했던 후쓰파는 화약기술을 익히 알고 있었던 잔 지즈카(Jan Zizka)의 지휘 아래 독일과 전쟁을 준비했다.

드디어 1420년 여름 지즈카는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프라하로 진군했다. 이 때 동원한 각종 화포는 역사상 최초로 네 바퀴 수레에 장치하였는데 이동할 때의 번거로움과 발사 시의 반동을 줄일 수 있었다. 후쓰파가 프라하에 도착한 직후 독일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황태자들을 보내 프라하를 포위했다.

이 때 독일군은 관례에 따라 갑옷을 입은 공작과 기사, 천민 출신의 보병, 고용된 화포병과 석궁수, 그리고 전리품을 탐내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모험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프라하를 수비하는 대항군 측은 일반 시민과 긴급히 고용된 자유 기업인, 7,000명 정도 뿐인 후쓰파가 전부였다. 7월 14일 독일군측은 봉건군대의 일반적인 전투방식에 따라 후쓰파들이 선점하고 있는 고지를 향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약기술 뿐만 아니라 전투 지휘에서도 탁월했던 지즈카는 치밀한 작전을 펼쳐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었다. 대패한 독일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2차 공격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프라하에서 철수했고 후쓰파도 원래의 근거지인 타보르로 돌아갔다.

지금도 프라하 교외에 있는 이 싸움터를 지즈코즈(Zizkoz)라 부르면서 지즈카와 농민들의 쾌거를 기념하고 있다. 금의환향한 후쓰파는 또 다시 색스니(Saxony), 바바리아(Bavaria),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독일의 영지를 마음대로 약탈하면서 다음 전쟁을 대비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에 독일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보헤미아 국경으로 200,000 대군을 파견하자 다시 일대 결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후쓰파의 병력도 40,000에 이를 정도로 크게 늘어나 예상보다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후쓰파는 50여회 이상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고 적어도 500개 이상의 성을 약탈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후쓰파가 연승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약병기로 무장한 전차가 자리 잡고 있지만 후쓰파 특유의 조직과 봉건영주들에 대한 적개심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화기개발붐

지즈카의 죽음 뒤에 일어난 내분 등으로 약화된 후쓰파는 1434년에 있었던 리파니(Lypany)전투에서 대패하면서 14년간의 긴 싸움을 끝냈다. 역사는 이 싸움을 후쓰파 전쟁(Hussite War)이라고 부르는데 화약사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 우선 전차의 개발이나 화포를 수레에 처음 장착하였다는 점에서 화기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천한 농노도 화기로 무장하면 칼을 찬 영주나 기사보다 강하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영국의 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흑색 화약이 모든 사람을 크게 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 후쓰파 전쟁은 화약병기의 보급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미 크레시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화기의 개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후쓰파 전쟁을 통해 화약병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 크레시 전쟁의 당사자였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화약병기의 개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소형 철관을 여러 개 묶어서 한 번의 점화로 모두 발사할 수 있는 다연장식 화기를 개발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서도 이를 응용함으로써 144개의 총열을 결합한 초대형 화약병기를 제작하였는데 이 무기는 동시에 12발식 12회 발사하는 다발식 화포였으며 4필의 말이 끌 정도로 육중했다. 이어서 1400년경에는 발사 시에 포신이 파열되지 않도록 철환대를 부착한 철제포가 등장하였으며 발사물로는 철탄이 사용되었다. 이 무렵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박보다 큰 철탄이 지금까지 벨기에의 겐트(Ghent)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무게가 10파운드 안팎인 휴대용 소화기까지 개발되었는데 발사체는 여러 개의 연구를 일시에 쏘는 연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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