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화기념관

전쟁에 얽힌 화약 이야기

중국 몽고군의 원정 크레시 전쟁 오스만 터키
희랍의 불 아랍지역의 화약 후쓰파 전쟁 영국과 스페인
11세기부터 본격적인 화약병기 등장

중국에서 화약을 사용한 병기로 추정되는 무기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당말로 고증된다. 904년 당이 예장(豫章 지금의 강서성 남창)을 공격할 때 비기(飛機)와 비화(飛火)를 써서 용사문(龍沙問)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초기형 화전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940년에 기술된 허동의 호령경에는 '화포는 화약을 사용하는 포를 말하며 화구는 구상으로 만든 화약을 화전 끝에 가까이 묶은 다음에 인선(引線)으로 점화시키고 포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송사중(宋史中)의 병사에는 970년 풍계승(馮繼昇)이 조정에 화전법을 진언하였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또한 975년에는 송의 조송이 화포와 화전을 사용하여 남당을 멸망시켰다는 사료도 발견된다. 따라서 중국의 경우 10세기 초에 이미 화약병기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10세기 후반에는 실전에 사용될 정도로 위력이 향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격적인 화약병기의 등장은 11세기에 접어들면서라고 할 수 있다. 1040년 북송 조정은 변경(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에 화약공장을 건설했으며, 1045년에 쓰여진 <무경총요>는 화약의 배합을 비롯한 화전, 화구, 질려화구 및 독약연구의 구조에 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북송(960-1126년) 시대의 화기 관련기록을 미루어 볼 때 11세기말에는 화약과 화기에 관한 기술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금나라의 화약 병기

송대 이후에 중국의 맥을 이은 금과 몽고(10-13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발되었던 중요 화기와 화약 관련사항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송: 비기-비화(904년), 화포-화구(940년), 화포-화전(975년), 화려(火藜)(1000년), 화약공장 건설(1040년), 무경총요(1045년), 질려화구-독연화구(毒煙火毬)(1045년), 금병포(1130년), 화석포(1161년), 철화포 (1257년), 대화포(1277년)
  • 금: 화약공장 접수(1127년), 철화포(1221년), 진천뢰(1231년), 비화창(1232년)
  • 원: 화약공장 접수(1214년), 독화부-화전-화포(1220년), 화포(1234년), 독연화구(毒煙火毬)(1241년),철화포 화전-화창(1257년)

화약병기의 발전이 빨라지면서 화기가 전쟁 무기의 주력으로 등장하게 됐고 화기가 없는 경우에는 고전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금군은 1126년 북송의 수도인 변경을 포위했을 때 송의 증갈(曾竭)이 사용하는 화기, 화전 및 화포에 의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1130년에도 화기를 보유하지 못했던 금군이 합주(陜州·하남성 협진)를 공격했으나 남성의 이언산(李彦山)이 금병포를 사용하여 방어했다. 실제로 금은 이에 앞선 1127년에 북송의 수도를 점령했을 때 화약 공장과 이에 관련된 모든 기술을 인수했지만 화약 병기의 사용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221년에 남송의 잠주(호북성의 잠춘)를 공격할 때는 처음으로 철화포라는 작열성 화기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1231년에 몽고의 선뢰(雷旋)가 금의 하중부(河中府)(협서)를 공략하였을 때는 진천뢰로 퇴로를 막고 있는 몽고선을 파괴한 다음에 통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서 몽고군과 금군이 변경에서 쟁탈전을 벌이던 1232년에는 금군이 비화창(飛火槍)을 사용하였으며 다음해에 있었던 1233년의 남경 전투에서도 금군은 비화창을 써서 몽고군을 격파했다.

몽고군의 화약병기

한편 1234년에 남송과 연합해 금을 멸망시킨 몽고는 1214년 금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면서 화약공장을 접수하고 화약병기 관련된 기술과 기술자들을 몽고로 가져갔다. 그러나 초기의 몽고군은 화약 병기의 사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용맹성에만 의존하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몽고군도 유럽 쪽으로 진출할 때는 몇가지 화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1219년에 있었던 서하(중앙아시아지역)의 오트라르(Ottrar)를 공격할 때 화약병기와 유사한 화공품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그리고 더욱 본격적인 화기는 1221년 넷사(Nessa)의 공략에 사용한 독화부, 화전, 화포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무렵 몽고군의 화기는 초기적인 형태로 실전에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몽고군이 중국 대륙을 침공할 때 사용한 화기는 금의 남경을 공략하던 1232년의 진천뢰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몽고군은 죽포로 석탄을 발사하여 성을 파괴하였으며 화포를 사용하여 성내를 불살랐다. 이어서 1234년에 채주(蔡州)(하남성의 여남)를 점령하고 1237년에 남송의 안풍(安豊)을 공격할 당시에도 각각 화포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몽고의 서정(西征)군은 1241년 폴란드의 발스타트(Wahlstadt)전에서 독약연구(毒藥煙毬)를 처음 사용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모라비아(지금의 슬로바키아)의 올뮈쯔(Olmuetz)성을 공략할 때에는 화전으로 사원을 불태웠으며 1258년 바그다드전에서는 진천뢰를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몽고의 재상인 백안(伯顔)이 1247년 남송의 사양(沙洋)을 공격할 때도 화포를 사용하여 공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몽고군의 계속적인 공략의 대상이 되었던 남송은 이종(理宗) 때인 1257년에도 월남(안서성)에서 북상한 몽고군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남송의 재상인 이증백은 정강(靜江)을 시찰하던 중 화약 병기가 대소철 화포 95문, 화전 95기 및 화창 105통뿐임을 알고 즉시 호북(湖北)의 형주(荊州)에서 보충시켰다. 당시 형주에는 1-2천문의 철화포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있었으며 양장(襄陽)과 종상(鐘詳)에는 철화포가 각각 1-2만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리고 1259년 남송의 수춘부(壽春府)에서 발사화기의 하나인 돌화창(突火槍)을 처음 발명했으며 1268년에는 몽고군에 의해 5년간이나 포위돼 있던 양양 등 호북성 선상에 설치한 화창으로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강이 함락되던 1277년에는 남송의 수장인 요령할(要玲轄)이 대화포에 점화시켜서 성벽을 파괴했으며 성 밖의 몽고병도 수없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이 밖에도 1264년 몽고·고려 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는 몽고군이 진천뢰와 동일한 것으로 추측되는 철포를 사용하였다고 일본의 문헌에서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고려나 중국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지만 당시에 몽고군이 사용하던 화약 병기의 수준으로 보아서 신뢰성이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1279년에 있었던 남송과 몽고의 마지막 결전지가 된 안산(岸山)에서는 양군이 서로 선상의 화포로 응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남송이 멸망하였다. 이처럼 동양에서 화약과 화기는 원(몽고)과 명 등에 의해서 더욱 발전했지만 화약 기술의 초기적인 바탕은 사실상 송·금·원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이지 인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