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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최무선과 다이너마이트 김

  • 최무선
  • 다이너마이트 김
왜구토벌에는 화약과 화포뿐

▲ 조선시대의 ‘천자총통(天字銃筒)’

최무선(崔茂宣 1325 ~ 1395년)은 최초로 화약과 화기를 직접 제작하여 우리나라 과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고려 시대의 발명가이자 무관이다. 오랜 고생 끝에 화약과 화포 제조 기술을 습득한 뒤 직접 생산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 <화약 수련법>과 <화포법>이라는 저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나 현재 전해지는 책은 없다.

<태조실록(太祖實錄 卷7 壬午條)>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경북 영주(지금의 영천)에서 경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병법에 대한 관심과 소질이 뛰어났던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방면에 대해 지식을 쌓아갔다. 고려말 당시 우리나라 해안에는 민가를 불지르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왜구가 창궐하여 그 피해가 매우 심했다. 왜구로 인한 피해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화약과 화포만이 왜구를 토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화약과 화포 제조 기술이 없던 고려는 1313년 11월 중국에 사신을 보내 화약과 화포를 나누어 줄 것을 간청했다. 화약 제조법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서 중국에서는 관련 내용을 모두 극비에 부치고 있었다. 중국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1374년 5월 겨우 염초 50근, 황 10만근의 화약 원료만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그 양은 화약을 만들기에는 너무 적어 결국 중국의 생색내기로 끝나고 말았다.

최무선은 이처럼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등장했다. 그는 화약처럼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군대 없이는 왜구 토벌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화약과 화포 제작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직접 중국을 다녀오는 한편 관련 서적들을 구해 연구에 들어갔다.

그러나 화약 제조법은 그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화약을 만드는 원료 3가지 중 유황과 분탄은 어렵게 그 제조법을 알아낼 수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초석은 도저히 만들 수가 없었다.

열정과 중국어 실력에 탄복해

최무선은 중국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예성강 항구 벽란도로 가서 화약의 제조법을 은밀히 탐문했다. 그러던 중 원나라의 염초장을 지낸 이원(李元)이라는 상인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최무선은 그를 찾아가 자신을 소개하고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약과 염초에 관해 물었으나 이원은 쉽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긴 최무선의 뜨거운 열정과 능수능란한 중국어 실력에 감복한 이원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후 최무선은 힘겹게 얻은 비법을 바탕으로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그러나 좀처럼 성공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좌절과 시련 속에서 최무선은 자신의 경험과 창의를 더해 수년간이나 실험을 되풀이했다. 그리고1376년 (우왕 2년) 마침내 독자적으로 화약 제조에 성공했다. 당시 최무선은 너무나 기쁘고 신기한 나머지 며칠을 울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상의 자료와는 달리 최무선이 원나라에 가서 직접 화약 제조 방법을 습득하고 돌아왔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즉 조선 초기 화기 발달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대학자였던 눌제(訥齊)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문을 보면 고려말 최무선이 원에서 화포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이를 전파했다고 전한다.

또 최무선의 증손자인 최식(崔湜)은 집안의 각종 자료를 토대로 증조부 최무선이 중국에 들어가서 화포 기술을 터득하고 돌아와 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자료들은 출처가 당대의 석학이거나 최무선의 직계손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따라서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 제조 기술 습득 과정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향후 학계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화기로 진포대첩 진두지휘

▲ 조선시대의 ‘신기전(神機箭)’

1377년 10월(우왕 3년) 최무선의 끈질긴 건의로 고려 조정에서는 화약과 화기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인 화통도감(火誌都監) 설치를 허가했다 .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제조관으로 임명되어 화약과 화약을 넣어 발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총과 대포의 연구 개발에 더욱 열중할 수 있게 됐다 . 이후 최무선은 수년간 몰두하여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육화석포(六火石砲), 화전(火箭), 주화(走火), 화통 등 약 20여종의 각종 무기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당시로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화포를 탑재한 전함도 건조했다 . 또 화통방사군이라는 화기 전문 부대가 편성된 것도 이 무렵이어서 이 시기에 실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무선은 또 화약과 화기를 제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에 나가 화기의 위력을 확인하기도 했다. 1380년(우왕 6년) 수많은 왜구들이 곡창 지대인 금강 하구로 침입해오자 나라에서는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출정시켰다. 이 전투에서 최무선은 자신이 직접 제조한 화기로 무장하고 무려 500여 척의 왜선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포해전(진포대첩)이다.

또 1383년에는 화포로 무장한 전함 10척을 이끌고 나아가 진도대첩의 승리의 주역이 됐다. 뿐만 아니라 최무선은 화약병기의 개발과 더불어 이를 적재하고 해상에서 싸울 수 있는 전함의 건조도 손수 감독하고 주도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여러 분야에 대한 견식을 바탕으로 중국 서적과 자료를 직접 참고하여 화포를 발사할 때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전함을 만들 수 있었다.

나라에서 혁혁한 공로 인정

우리나라의 화약과 화포 기술 발전사에서 찬란한 업적을 쌓은 최무선은 조선조까지 생존했으나 연로하여 화기 제조에 참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는 1389년 창왕이 경비 절감을 이유로 화통도감을 없애자 고향으로 돌아가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과 같은 화약 및 화포 관련 서적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련 자료의 발굴과 정리에도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자료는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통해 조선 초기의 화약과 화포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불행히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조선 태조는 최무선의 혁혁한 공을 인정하여 특별히 검교참찬(檢校參贊)이란 벼슬에 제수했다. 그리고 1395년 그가 70세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부의를 후하게 내렸다고 한다. 이후 태종은 임금에 오른 첫해 최무선의 생시 공적을 기려 의정부 우정승의 벼슬을 내리고 영성부원군에 봉해 그의 숭고한 뜻을 기렸으며 그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소감에 등용하기도 했다.

최무선은 오직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평생을 바쳐 화약과 화약 병기를 만드는 데 전념했고 그 결실로 왜구를 물리쳐 수많은 양민을 구할 수 있었다. 1395년 4월 최무선의 죽음을 기록한 <태조실록>은 화약과 화약 병기를 제조하여 나라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생애였다고 그에 대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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