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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노벨과 화약

다이너마이트의 발견과 발전

오늘날 가장 명예롭고 권위 있는 상으로 불리는 노벨상의 밑거름이 된 다이너마이트의 발명도 주의 깊은 관찰로부터 나왔다. 노벨은 평생 동안 355개의 특허를 획득하였다. 최초의 특허는 폭약과 관계가 없는 기계의 개량에 관한 것이었다. 크리미아 전쟁이 끝나고 무기제조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하기 전의 일이었다. 노벨의 나이 24살 때였다. 당시 노벨은 전문교육을 받은 과학자도 아니었으며 액체 폭약을 생산하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 당시 사용하던 액체 폭약은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화학물질을 원료로 하였는데 이것은 조그만 충격에도 잘 폭발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수시로 폭발사고가 발생했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노벨의 동생도 희생자중의 하나였다. 1863년 노벨의 나이 30세 때였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군사용 폭약 제조에 종사했었기 때문에 폭약을 개조하는 것은 노벨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브레로(Ascanio Sobrero, 1811-1888년)라는 1847년 이태리의 외과의사이며 응용 화학자가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당시로써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폭약을 소개 받으면서 노벨의 천재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폭약은 충격이나 마찰 등에 매우 민감해 쉽게 폭발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어 실험에 사용하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발견자의 충고를 무시하고 노벨은 이 강력한 폭약의 장래성을 예견하였다. 그 후 폭약을 안전하게 수송하고 강력하게 폭발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니트로글리세린과 흑색화약을 혼합시키고 혼합물을 보통의 도화선으로 폭발시키는 실험을 여러 차례 시행했다. 폭발력은 대단했지만 액체 상태였기 때문에 운반하거나 시공 중에 폭발해버리는 일이 많아서 매우 위험했다.

그 후에 노벨은 매일같이 폭약을 가지고 실험에 연구를 거듭하던 어느 날 노벨에게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니트로글리세린이 든 통을 기차에서 내리는 운반 작업 도중 어딘가에서 구멍이 뚫렸는지 통 속의 액이 새어 나와 주위의 규조토에 스며들어 굳어지는 것을 본 노벨은 자세히 살펴보니 규조토는 이전의 숯가루, 톱밥 등의 실험재료에 비해 니트로글리세린을 두 배 이상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재료구나!' 노벨은 곧바로 실험실로 가서 연구에 매달렸다. 실험결과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충분한 폭발력을 발휘한 만큼 흡수력이 뛰어나면서도 망치로 두드려도 터지지 않을 만큼 안전하고 견고했다.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뇌관을 사용했을 때만 강력한 힘을 내면서 터졌다. 노벨은 필요한 때만 터지는 이 고체폭발물을 다이너마이트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가 1867년이었다. 그 무렵 때맞춰 수에즈운하가 건설되었고 알프스산맥에 터널을 뚫는 등 대공사가 줄을 이어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다이너마이트와 바리스타이트라는 운반에 안전하고 폭발 조작이 쉬운 폭약의 발견과 발전은 공업, 광업 등에 크게 공헌을 하게 된다. 발명가이면서 대단한 사업가의 소질을 타고난 노벨은 이런 난관을 꿋꿋이 헤쳐 나갔고 20개국 이상에서 대략 80여 개에 이르는 범세계적 기업군을 만들어냈다.

이 같은 성공에도 노벨은 연구를 중단하지 않고 시판 중인 규조토 다이너마이트보다 더욱 우수하고 안전한 제품의 개발에 더욱 열중했다. 노벨은 이 새로운 고성능 폭약을 즉시 제조해 '다이너마이트 껌'이라는 상품명으로 시판했고 얼마 후에는 기존의 다이너마이트와 구별해 '폭파 젤라틴(Blasting gelatine)'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지금도 널리 사용되는 폭파 젤라틴은 "시험관이 아니라 노벨의 손가락에서 탄생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벨의 집념과 우연이 어우러져 생겨난 것이다. 폭파 젤라틴의 등장으로 광물 자원의 채굴이나 토목공사 분야에서 혁명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불가피하게 군사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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