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 김종희 회장 일대기 만화보기 - 만화 CEO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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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김종희 회장 일대기 만화 자막

제1편 부대리에서 키운 꿈

한국화약그룹(현재의 한화그룹) 창업자 현함 김종희 회장은 일제의 침탈이 심화되어 가던 1922년 11월 12일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재민 공은 체격이 건장했다.

김종희 대사 : 아버지, 어디가세요?

재민공 대사 : 집에서 쉬면 모하니? 밭 좀 둘러보마.

김종희 대사 : 다녀오세요.

과묵하면서도 부지런했다. 그러나 부대리는 주변에 산이 많고 토질이 척박한 빈촌이었다. 농한기 겨울 한 철엔 산에서 나무를 해 장에 내다 팔아 식량을 보태야 했고, 봄이 되면 허기진 배를 안고 가파른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가난한 부대리에도 자랑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김종희 대사 : 야! 너네 동네에 학교 있어?

다른동네 아이 대사 : 아니, 서당은 있어.

김종희 대사 : 바보야 ! 이젠 신식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거라구.

다른동네 아이 대사 : 부럽다.

다른 마을엔 없는 학교가 있었다. 1910년, 영국 성공회 신부 세실 쿠퍼 (한국이름: 구세실)가 사제로 부대리에 부임했다. 성당을 신축하고 30평짜리 교실 두 칸을 세워 마을 아이들에게 신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세실 쿠퍼는 영국 해안 장교출신이며 인도 총독의 아들로 1909년,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평생을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김종희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리시기에 서양 문화와의 만남으로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김종희 대사 : 우와, 세상은 참 넓구나!

김종희는 4남 1녀 중 둘째로 비록 집안형편은 어려웠지만 구김살이 없고 명랑했다.

친구 대사 : 야! 종희, 대갈장군

아버지를 닮아 남에게 지기 싫어하며 강직했다.

친구 대사 : 대왕머리! 우하하!

김종희 대사 : 짜~식들!

머리가 유난이 커서 어릴 적 별명이 대갈장군이었다.

동네 어른 대사 : 옛날부터 머리가 크면 장군감이라 했는데...

2학년 말, 아버지의 장사 실패로 종희네 집은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날품팔이로 살아가는 대전생활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재민공 대사 : 오늘은 비가 오는 바람에 공�소.

아이들 대사 : 아빠다!

어머니 대사 : 쌀독이 바닥났어요.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김종희 대사 : 아버지 나도 학교에 가고 싶어요.

재민공 대사 : 조금만 기다려라.

대전에서 1년이 지날 무렵

종호 대사 : 아저씨!

재민공 대사 : 종호 아니냐! 네가 웬일이냐?

종호 대사 : 아저씨, 고생이 얼마나 많으세요? 아버지께서 아저씨를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재민공 대사 : 참말이여? 네 아버지는 어디서 뭘하고 있는데?

종호의 아버지 봉서 공은 천안 삼덕리에서 금광을 하고 있었다.

재민공 대사 : 어렸을 적에 네 아버지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자랐지.

종호 대사 : 네!

재민공 대사 : 네 아버지가 말썽을피우면 감싸 주느라 내가 대신 종아리도 맣이 맞았어. 하하하...

종호 대사 : 아버지도 그 말씀 많이 하셨어요.

재민 공은 두 살 아래인 사촌동생 봉서 공을 끔직이 사랑했다.

봉서공 대사 : 형님, 벽촌에서 팥밭이나 일구는 것보다 요즘 잘나가는 사금광에 가서 품을 파는 것이 벌이가 훨씬 낫겠어요.

봉서공이 객지로 뛰쳐 나간 것은 열두 살 되던 해엿다.

봉서공 대사 : 형,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요.

봉서 공은 신임을 얻어 여주군에 있는 어느 사금광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인 광부라도 자기 밑에 들어오면 꼼짝 못하게 휘어잡는 통솔력이 있었던것이다.

일본인 감독 : 사장님, 조선인에게책임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일본인 사장 : 일에 빈틈이 없잖아!

봉서공 : 다음 근무조 빨리 빨리 집합!

광부들 : 하잇!

드디어 봉서 공은 독자적으로 금광사업을 해서 성공했다.

종호 대사 : 아버지가 아주 반가워하실 겁니다.

봉서공 대사 : 어이쿠, 형님, 잘 오셧습니다!

재민공 대사 : 이게 얼마만인가?!

봉서공 대사 : '노다지'에 미쳐 돌아다닌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던 제가 이렇게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재민공 대사 : 아닐세, 난 동생이 꼭 성공할 줄 알았어.

봉서공 대사 : 형님, 이번에 제가 새로 집을 지었으니 이쪽으로 이사와서 아래윗집에서 우애 좋게 삽시다.

재민공은 적산리를 떠나 상덕리 봉서 공의 옆집으로 이사를 오고, 김종희는 그 지역에서 이름이 알려진 직산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다.

김종희 대사 : 이전의 가난했던 부대리의 김종희가 아니다. 너 오늘도 도시락 못 싸왔구나. 내 도시락 나눠 먹자.

친구 대사 : 고,고맙다 종희야!

현암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십 리길을 걸어서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봉서 공은 인심이 후해 어려운 일가친척을 도와 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봉서공 대사 : 죽으면 싸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있을 때 베풀어야 하지 않겠수?

머슴 대사 : 이건 누구 집에 보낼까요?

재민공에게는 사금광의 광구 한 곳을 때어 주었다.

봉서공 대사 : 이 정도면 아이들 가르치고 먹고사는데에는 걱정 없을 겁니다.

재민공 대사 : 동생, 이렇게 고마울수가.....

재민공은 사금광에서 번 돈으로 차곡차곡 농토를 장만해 나갔다.

김종희 대사 : 아버지, 금광도 잘되는데 농토는 왜 자꾸 사세요?

재민공 대사 : 사금은 앞으로도 무진장 케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사금광이 폐광 되기 전에 논밭을 더 늘려놔야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지 않겠니? 앞으로 4남 1녀나 되는 아이들을 다 결혼시키려면 이것도 부족하다.

그 시기에 김종희가 도상(경기도립상업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졌다.

재민공 대사 : 괜찮다. 네 형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넌 시골에서 농사나 짓거라. 네게 맞는 지게도 하나 샀다.

김종희 대사 : 아버지, 저도 농사일 안 하고 형처럼 공부하면 안 돼요?

재민공 대사 : 야가 참, 이번 시험 떨어지면 농사일 하겠다고 네가 안 그랫냐?!

김종희 대사 : 그건 꼭 붙을 생각으로 그런 말한 거지유. 아버지, 내년에 한 번만 더 보고 떨어지면 그�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할게유.

재민공 대사 : 안돼야! 내년, 내년하다 �를 놓치면 이것저것 다 안 된다. 농사일은 한 살이라도 더 어려서 몸에 배게해야지. 안 그러면 이도저도 안 되고 마는겨!

제2편 청운의 꿈

재민공 대사 : 아버지 일 다녀 오마.

김종희 동생 대사 : 다녀오세요~!

재민공 대사 : 종희야, 종희야!

김종희 동생 대사 : 아버지, 형 어젯밤에 나갔는데유.

재민공 대사 : 네 형이 간밤에 집에서 안 잤단 말이냐?

김종희 동생 대사 : 네, 그랬시유.

재민공 대사 : 허 참, 새로 사 준 지게를 때려 부수다니, 이 녀석 들어오기만 해봐라!

그 시각, 서울 봉서 공 집

봉서공 대사 : 이런 엉뚱한 녀석을 봤나?! 그래서 그 지게를 때려 부수고 올라왔단 말이냐!

김종희 대사 : 네 당숙, 흑흑흑흑..

봉서공 대사 : 듣기 싫다! 뭘 잘했다고는 우는게야!!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게 공부인데, 아버지가 사 준 지게를 부숴 놓고 몰래 서울로 와?! 아무 말 말고 당장 저녁차로 내려가서 아버님께 '잘못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빌어라.

김종희 대사 : 잘못 올라 왔나벼

봉서공 대사 : 공부를 더 하고 싶거들랑 이 당숙 말을 들엇!

김종희 대사 : 네?

봉서공 대사 : 내가 수일 내로 내려가서 네 아버지를 설득해 보마. 대신 내년엔 꼭 합격해야 한다.

김종희 대사 : 당숙, 감사합니다.

봉서 공의 설득으로 김종희는 성환의 심상소학교에 진학했다.

재민공 대사 : 죽기로 하니 합격하겠는걸? 조선학생이 도상에 들어 가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는 거라던데, 설마 시골 학교 출신인 종희가 들어 가려구? 학비며 하숙비가 만만찮을 텐데...

김종희 대사 : 아버지 됐시유~!

그러던 차에 1년 후, 중회가 도상에 떡 붙은 것이다.

재민공 대사 : 붙었으니까 보내주긴 보내 준다만. 서울 가서 하숙 하는 건 생각도 말아.

김종희 대사 : 그럼 어떻게 해유?

재민공 대사 : 매일 새벽 6시면 성환역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통근 열차가 있잖여!

그때부터 김종희의 멀고먼 기차 통학이 시작되었다.

김종희 대사 : 5시 50분에 집을 나서 서울역 도착이 8시 30분, 효자동까진 전차로 15분, 그리고 도상까진 도보로 10분, 바쁘다 바빠!

통근 열차가 5분이라도 여착을 하게되면 그날은 영락없는 지각이었다.

선생님 대사 : 게으른 놈들, 10분만 일찍 일어나도 지각은 안할거 아닌가?!

고달픈 기차 통학이었지만 지각은 많아도 1,2학년 내내 결석 한 번 없었다. 김종희는 맞는 교복이 없을 정도로 체격이 좋았다.

친구 대사 : 종희, 시골뜨기. 머리가 커서 맞는 모자도 없대.

천성이 명랑하고 쾌활해서 늘 구김살 없이 웃었다.

친구 대사 : 종희야, 애들이 시골뜨기라고 놀리는데 놔두냐?

김종희 대사 : 시골에 사니깐 시골뜨기지 뭐. 재들은 서울 사니 서울뜨기고.

김종희 대사 : 아버지, 저도 학급에서 1등 한 번 해보는게 소원이에요.

재민공 대사 : 원, 싱거운 녀석! 열심히 하면 되지. 나더러 어쩌란거여?

김종희 대사 : 통학하는 데만 하루 6시간이 소모되고. 기차에선 공부를 해도 머리 속에 잘 안 들어와요. 한 학기 동안만 하숙 시켜 주세요.

재민공 대사 : 별소릴 다 듣는다. 꼭 하숙을 해야 1등을 하남? 내년엔 네 동생도 중학엘 가야 할게 아니냐?

김종희 대사 : 그러니깐 3학년 한학기만 하숙 시켜주세요. 제가 편하려고 그러는게 아니에요.저도 1등을 할 수 있나 없나 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에요.

아버지는 서울 사는 친구 집에 부탁해 종희를 하숙 시켰다. 종희는 학교 가는 시간외에는 하숙방에 틀여박혀 무섭게 공부했다.

하숙집 아주머니 대사 : 종희 학생, 밥은 먹고 해야지.

김종희 대사 : 네, 이것만 끝내고요.

3학년 1학기 말 시험에 드디어 반에서 1등을 했다.

선생님 대사 : 김종희, 그동아 노력 많이 했구나.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김종희 대사 : 넷!

4학년 1박기 말에도 다시 반에서 1등을 했다. 봉서 공이 이사 창성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종희 대사 :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도 공부를 못하면 안 되지.

종희는 공부 시간에는 선생님의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치 않고 받아 적었다.

김종희 대사 : 빨리 받아 적다 보니 글씨가 악필이구나.

위트와 유머가 있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선생님 대사 : 종희 군은 예의 바르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다.

제3편 억울한 퇴학 처분

4학년 2학기 중반 무렵

김종희 대사 : 앗. 우리 학교 학생들끼리 패싸움을? 뭐얏, 조선인 학생은 3명인데 럭비부 일본인 학생은 4명이잖아?

의협심이 강한 김종희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김종희 대사 : 야, 비겁하게 무슨 짓들이야!

김종희는 박치기로 일본인 학생들을 모두 쓰려뜨렸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 간의 패사움이 학교에 알려져 싸움에 가담한 8명 전 원이 퇴학을 당했다.

김종희 대사 : 내가 퇴학당한 사실을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하문 언덕을 넘어 정처 없이 걷다가 한 정자에 이르렀다.

김종희 대사 : 세검정?

3백여 년 전, 광해군의 폐위를 다짐하며 몇몇 사람들이 이 누각에 모였다.

장군 대사 : 우리 모두 저 흐르는 물에 검을 씻어 이번 거사의 성공을 천지신명께 발원합시다!

다른 장군들 대사 : 좋소이다!

광해군 10년에 일어난 사건은 대북파에게 억눌려 지내오던 서민 일파에게 반정의 명분을 주었다. 김류, 이귀 등 몇몇 서인들은 세검정 아래로 흐르는 정한 물에 장검을 씻으며 성공을 다짐하고 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김종희 대사 : 대북파의 압제하에서도 문충공 김류에께서는 굴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고 한 나라의 영상 자리에 까지 오르셨다. 김종희. 너도 김류 어른의 후예가 아닌가!

김종희는 당시 서울 성공회 대성당에 와 있던 세실 신부를 찾아갔다.

김종희 대사 : 신부님!

세실 신부 대사 : 오~! 디도, 어서 오게. 디도, 울지 말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사람을 키우신다네.

봉서공 대사 : 사내녀석이 그깟 일 가지고 기가 죽고 그래?! 학교를 다니다 보면 퇴학 당할 수도 이는 거다! 내가 원산상업학교를 알아봐 줄 테니 걱정마라!

김종희 대사 : 당숙, 고맙습니다!

김종희는 봉서 공의 주선으로 원산공립상업학교로 진학했다. 봉서 공의 부탁으로 원산경찰서장인 고이케 경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김종희 대사 : 김종희 입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잘 왔네. 알려서 좋을 게 없으니 경기도립상업학교에서 퇴학 당했다는 말은 일체 하지 말게.

김종희 대사 : 명심하겠습니다.

학생들은 원산경찰서장의 관사에서 통학하는 종희를 의아해했다.

학생 1 대사 : 왜 조선 학생이 그곳에서 머무르지?

학생 2 대사 : 혹시 친일파 아들 아냐?

학생들이 경계하고 따돌리자 공부할 의욕을 잃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김군, 나 좀 보세.

김종희 대사 : 네, 서장님

고이케 경부 대사 : 김군, 한잔 어떤가?

김종희 대사 : 예, 받겠습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핫하하, 자넨 역시 사나이야!

고이케 경부는 어는 일제 경찰관처럼 교활하거나 포악하지 않고 근엄하면서도 자상햇다.

고이케 경부 대사 : 아마도 김군하고 이렇게 마시는 것이 원산에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네.

김종희 대사 : 경성으로 영전해 가시는 겁니까? 축하 드립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고맙네, 김군의 하숙 문제는 어�게 했으면 좋겠나? 관사에 계속해서 있고 싶다면 내가 후임자에게 부탁할 수도 있네.

김종희 대사 : 아닙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김군, 나는 그동안 자네를 특별히 지켜보았네. 자네는 자네의 그 체격만큼이나 대범하고 그 큰 머리만큼이나 명석하더군. 자네는 인상처럼 온화한 반면 강한 근성도 지니고 잇지. 그러나 자네가 생각하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네.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명심하기 바라네.

김종희 대사 : 아니야..

빼앗긴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김종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졸업하면 경성에서 다시 만나세.

김종희 대사 : 네.

고이케 경부가 전근을 가자마자 하숙을 옮겼다. 그런데 고이케 경부의 그 말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김종희 대사 : 조선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진다면 이 따위 공부할 필요가 뭐 있어! 아니야, 만주에서는 우리 독립군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다시 우리 조선을 찾을 날이 올거야. 내년 졸업식 �까지는 꼭 도상 당시의 실력을 발휘하자.

그때쯤, 학교에서도 도상에서의 일이 소문이 났다.

학생 1 대사 : 종회가 럭비부 일본인 학생을 4명이나 쓰러뜨렸다며?

학생 2 대사 : 친일파 집안도 아니래.

학생 3 대사 : 공부도 늘 1등만 했다더라.

학생 4 대사 : 김종희, 네가 도상에 있을 때 일본 럭비부 학생들을 묵사발 만들었따는 게 사실이냐?

김종희 대사 : 상상에 맡긴다.

김종희는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학생 1 대사 : 역시 대범한 친구였어.

학생 2 대사 : 우리가 친일파 아들이라고 했을 때 변명 한마디 없었지.

학생들 사이에서 김종희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그러나 고이케 경부의 말이 늘 그를 괴롭혔다.

김종희 대사 : 조선이라는 나라, 조선이라는 나라. 고이케 경부의 말대로 설령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질지라도 나는 조선사람으서 의연하게 살아갈 것이다.

제4편 조선화약공판 입사

1941년 12월,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김종희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김종희 대사 : 사회인이 되었으니 인사를 드리러 가자.

김종희 대사 : 당숙, 공부를 더 해볼까 합니다.

봉서공 대사 :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한번 일해 보는게 어떠냐?

김종희 대사 : 네?

봉서공 대사 : '조선화약공판'에서 마침 사람을 구한다고 하더라. 네 됨됨이가 출중하다고 따로 천거한 사람이 있다니 좋은 기회가 아니냐?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는 남대문 부근, 3층 건물에 있었다. 이 회사는 일제가 강력한 전시경비체체를 확립할 목적으로 시행한 '기업정비령'에 의해 통합된 회사로써 그 권한이 막강했었다.

김종희 대사 : 김종희 입니다.

미야모도 사장 대사 : 반값네, 김종희 군!

미야모도는 통합된 회사의 시장을 맡고 있었다. 관리직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김종희를 포함 5명 뿐이었다.

친구 대사 : 종희야, 취직했다며 한턱 내라.

김종희 대사 : 그래.

제5편 화약과의 인연을 맺다

1942년 5월, 일본은 이미 필리핀, 말레이시아, 버마(현재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하여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김종희는 열심히 업무를 파악하고 수행한 결과 채 1년이 지나기 잔에 사내 입지를 확실히 다지면서 화약 산업의 중요성에 대하여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김군, 나와 같이 인천 화약공장에 견학하러 가자.

김종희 대사 : 넷, 부장님!

마쓰무로는 조선유지 인천 화약 공장장을 지낸사람으로, 화약에 관한 전문지식은 물론 정치, 경제, 문학 등 각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인천화약공장(현재의 고잔동)은 김종희도 처음가보는 곳이었다.

김종희 대사 : 초화공실? 부장님, 이 건물은 왜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나요?

마쓰무로 부장 대사 : 화약공장은 항상 폭발 위험이 따른다. 때문에 한 공실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연쇄 폭발을 막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실 주위에 토제를 쌓아 격리 시키는 거다. 노벨이 1864년 처음 니트로글리세린 제조 실험을 할 때는 호수 한가운데다 배를 띄어 놓고 실험한 적도 있지. 김군, 다이너마이트가 무슨 의미인지 아나?

김종희 대사 : 모릅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화약장사를 하려면 그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김종희 대사 : 가르쳐주십쇼.

마쓰무로 부장 대사 :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이 33세 �인 1866년, 독일 함부르크의 공장 연구실에서 발명했지. 최초의 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만든 규조토 폭약이었다. 규조토 폭약은 액체인 니트로글리세린 보다 훨씬 안전하고 종전의 흑색폭약 보다 폭발력이 5배나 강했다. 그래서 노벨은 규조로 폭약에다 희랍어의 '힘'이란 뜻을 지닌 다이너마이트(dynamite)란 이름을 붙인 거야.

김종희 대사 : 그렇군요.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그러나 노벨도 지하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걸 후회하고 있을거다.

김종희 대사 : 왜 후회 합니까?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그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가공할 세계전쟁은 안일어났을 테니까.

김종희 대사 : 하지만 지금 일본은 전쟁에서 연승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쓰무로 부장 대사 : 누가 이기고 지는게 문제가 아니다! 인류 문명이 현재 전쟁 미치광이들에 의해 파멸되어 가고 있다. 인류 역사상 모든 전쟁은 비극으로 끝났어. 그것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마찬가지였지.

김종희 대사 : 마쓰무로 부장은 반전론자임에 틀림없다.

날이 갈수록 일본군의 전세는 불리해지는 것 같았다.

친구 대사 : 종회야, 일본군이 구아달카날 제도에서 철수했다며?

김종희 대사 : 태평양전선에 이상이 생긴 거야.

1943년에는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새로 들어선 정권이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일본군이 다시 솔로몬제도에서도 철수했다는 발표가 잇따랐다.

친구 대사 : 전쟁의 끝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아?

김종희 대사 : 더 두고 보자.

그해 여름, 김종희는 마쓰무로의 주장으로 홍제동에 있는 화약고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기숙사 관리인 대사 : 부장님, 조선인의 기숙사 사용은 안됩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그런 규정은 없다!

그곳엔 각종 폭발물이 맣아 조선인 직원의 입주 금지는 불문율이었으나 마쓰무로부장이 깨뜨린 것이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김군, 화약이야말로 인류문명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계 4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일세.

김종희는 이때부터 화약에 관한 호기심 생겼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4대 발명품은 향해술을 발전시킨 나침반의 발명, 동양 문화를 꽃피운 활자와 종이의 발명 그리고 정치, 경제, 군사 발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화약의 발명이야!

김종희는 마쓰무로 부장으로부터 화약이 근대 산업에 끼친 영향, 노벨의 위대한 생애, 화약의 역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자, 이책을 읽어 보게.

김종희 대사 : 아하, 화학의 원리가 이렇군요!

김종희는 이때 처음으로 화약에 대한 개념을 파악햇다.

자연계의 물질이 공기속의 산소와 화합하는 것을 산화 현상이라고 한다.

김종희 대사 : 쇠붙이에 녹이 슬고 음식물이 쉬는 것은 다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산화하는 거구나.

산소가 어떤 물질과 화합하는 반응에는 연소 현상도 있다.

김종희 대사 : 성냥을 그으면 불이 나면서 빛과 열을 발생시키는 것도 역시 산화 반응이로구나.

같은 산화라고 하더라도 반응 속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구분된다.

김종희 대사 : 쇠가 녹스는 것이나 음식이 쉬는 것보다는 연소의 반응 속도가 훨씬 빠르다.

그러나 연소도 같은 사화 반응인 폭발에 비하면 느린 편이다.

김종희 대사 : 폭발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적인 산화반응으로...

폭발이랑 어떤 물질이 급격히 연소하면서 고온의 열(熱)과 함께 다량의 가스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물질이 연소를 하고 폭발을 하느냐는, 반응에 필요한 산소가 어떻게 공급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연소 반응은 공기 중의 산소를 이용, 서서히 타는 것으로서 연소 속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폭발에 이를 수는 없다. 특히 산소가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연소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폭발이 가능한 물질들은 자체 내에 산소를 다량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순간적인 연소 즉 폭발이 가능하다.

연소산칼륨이나 질산 칼륨은 그 자체의 많은 양의 산소를 가지고 있어 외부의 공기 없이도 스스로 연소가 가능하고 다른 물질에도 산소를 공급해 줄 수 있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이들과 가연물을 혼합하면 그 혼합물은 염소산칼륨이나 질산칼륨이 가지고 있는 산소를 이용하여 손쉽게 폭발할 수가 있다. 이처럼 산소공급제와 가연제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마찰, 타격, 열, 불꽃과 같은 외부 자극(충격)에 의해 급격한 화학 반응(연소, 폭발)을 일으켜 고온의 열과 함께 다량의 가스를 발생시키는 물질을 '화약'이라고 한다. 즉 화약이랑 물질의 산화 반응 특성을 연구 발전시킨 인조 폭발물인 것이다.

김종희 대사 : 확약을 사용해서 거대한 암석과 같은 고체 물질을 파괴할 수 있는것은... 바로 화약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기체가 순간적으로 열에 의해 가열, 팽창되면서 충격 파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보통 산업용 화약들은 폭발 속도가 초당 3천 미터에서 8천 미터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제6편 조국의 화약계를 지키는 등대수

1944년 1월, 김종희는 생산부 다이너마이트계 계장으로 승진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승진을 축하하네, 생산부에 가서도 노력하길 바라네.

김종희 대사 : 부장님, 화약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그러자면 생산 실태를 파악해야해, 여러 공장에 출장도 가고, 이런 좋은 기회에 많은 것을 배워 두게. 자네가 장차 화약회사 사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김종희 대사 : 그렇다, 언젠가는 나도 사장이 될 수 있어.

이제 전쟁은 일본의 패배가 확실했다. 미군은 필리핀의 루손 섬, 유황도 및 오키나와까지 상륙했다. 일본 본토는 연인 B-29의 폭격을 받더니, 1945년8월6일엔 히로시마, 9일엔 나가사키 상공에서 원자탄이 터졌다. 그리고 1945년 8월15일 정오, 전국의 라디오를 통하여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왕 대사 : 선량하고 충실한 신민들이여...짐은...

벌써 거리마다 사람들의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김종희도 감격에 겨워 인파에 휩쓸렸다.

김종희 대사 : 간신히 빠져나왔네, 모두들 어디 갔어?

여직원 대사 : 옥상으로 끌고 갔어요.

김종희 대사 : 옥상으로 끌고 가다니? 누구를 끌고 갔단 말이야?

여직원 대사 : 가 보면 아세요.

김종희 대사 :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 이게 무슨 짓들이오?

그곳엔 강선호가 일본인 간부들을 꿇어앉혀 놓고 있었다.

강선호 대사 : 김계장,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김종희 대사 : 이 사람들을 왜 꿇어앉혀 놓고 있는 거요?

강선호 대사 : 뭐라고? 지금까지 조선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면서 강압적으로 일만 시켜 온 자들인데, 김계장은 우리가 잘못한다는 거야, 뭐야?

김종희 대사 : 이들은 이미 백기를 들고 항복한 사람들이오, 지금은 오히려 이들에게 아량을 보여야 할 때요!

강선호 대사 : 넌 이 자들한테 잘 보여 계장이 되더니만 역시 일본놈들 편이었구나?!

김종희 대사 : 강선호, 너야말로 어제 아침까지도 일본 사람들의 발바닥을 �고 다니던 똥강아지 아니더냐!

강선호 대사 : 뭐야, 이자식이!!

김종희는 운동을 좋아해서 무도관에 다니며 유도를 배우고 있었다.

김종희 대사 :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런 간사한 자의 선동으로 부화뇌동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화약 산업 시설과 재물은 앞으로 조국의 산업발전의 도구로 활용해야 할 귀중한 자산입니다. 지금 민족 해방의 첫걸음을 걷고 있는 이때 고작 우리의 할 일이 패망한 사람들에게 보복이나 하는 겁니까? 우리 이 사람들의 결박을 풀어 줍시다. 그리고 상부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우리는 각자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합시다.

직원들 대사 : 옳소! 짝! 짝!짝

김종희 대사 : 마쓰무로 부장님 못 봤나?

여직원 대사 : 오늘 안나오셨어요.

김종희는 서둘러 홍제동 사택으로 달려갔다.

김종희 대사 : 부장님!

마쓰무로 부장 대사 : 잘 왔네,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야. 이제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야지.

김종희 대사 : 부장님, 그동안 제게 베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쓰무로 부장 대사 : 그건 호의라기보단 내 욕심 때문이었어, 일본은 조선에 화약공장을 건설하고도 조선인에게 화약에 대한 전문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금지해 왔지. 나는 화약인의 양심상 우리가 조선 땅에서 이룩한 화약 산업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네. 그래서 몇몇 조선인을 주요 생상 공정에 투입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기술을 익히기도 전에 해방이 되고 말았구먼. 조선에서 일본인이 떠나고 나면 기술자가 없는 화약공장들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될 것이네. 분명한 것은, 화약 없이 산업 근대화를 이룬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한 나라도 없다는 사실이야. 자네가 진정으로 자신의 조국 조선을 사랑하거든 자네만은 화약계를 떠나지 말아주게.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네.

김종희 대사 : 알겠습니다! 명예를 얻지 못할지도 모르고 빛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부터 해방된 조국의 화약계를 지키는 등대수가 되겠습니다!!

1945년8월, 미.소 양국은 한국의 분할 점령을 발표하였으며 9월8일,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9월9일, 조선 총독 아베가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통치는 종막을 고하고 미군정 시대가 새롭게 개막되었다. 해방된 지 불과 한 달, 각 직장마다 자치위원회가 결정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추천으로 김종희도 조선화약공판의 위원장이 되었다.

김종희 대사 : 지금 같은 혼란기에는 화약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합시다.

직원들 대사 : 옛!

어느날, 사장실에서 김종희를 불렀다.

사장 대사 : 김계장, 이리 앉아요. 우리는 조만간 일본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오. 회사의 업무 일체를 김 계장에게 인계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소.

김종희 대사 : 여러분이 물러나면 회사 업무는 자치위원회가 맡게 되는거 아닙니까?

사장 대사 : 자치위원회는 법적 근거가 없는 임의 단체에 불과 합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해체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위원장 자격은 자동으로 소멸되는 겁니다. 그래서 중역회의에서 오늘 날짜로 김 계장을 조선화약 공판의 지배인으로 선임하는 한편, 회사 업무 일체를 인계하기로 한 겁니다.

김종희 대사 : 나를 지배인으로?! 어차피 누군가가 인수애햐 할 화약공판 업무다. 합법적으로 업무를 인계하겠다는 제의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사장 대사 : 자, 이 서류들에 서명 날인만 하면 됩니다.

조선인 사원들은 이 일을 당연하게 일로 받아들였다.

사원 1 대사 : 김 계장이 지배인이 되었다며?

사원 2 대사 : 그 사람 아니면 할 사람이 없지.

사원 3 대사 : 일꾼인데 잘된거야. 암!

1945년 9월, 모든 일본인들이 총 퇴진하고, 김종희 지배인 중심의 '조선화약공판' 주식회사 체제가 들어섰다. 38선 이남 총 31개의 화약고를 관리하는 국내 유일의 화약 취급기관의 운영주체가 된 것이다. 김종희는 우선 일본인의 퇴진으로 공성이 된 각 영업소장을 임명했다.

김종희 대사 : 서둘러 임명하지 않으면 화약고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해 10월2일을 기해서 미군정청이 남한의 광산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김종희 대사 : 잘 됐다. 앞으로 화약의 수요가 늘어날 테고 화약은 '조선화약공판'을 통해서 공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약은 허가 받은 사람만이 매매가 가능했던 것이다.

김종희 대사 : 새 조국 건설에 나는 화약 분야로 기여할 테다!

그 사이 동생의 죽음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고 시골에 다녀오게 되었다.

김종희 대사 : 내가 지배인이 된 것은 모두 마쓰무로 부장님 덕분이니 고맙다는 뜻을 전하자.

사원 대사 : 조선화약공판 일본 사람들은 오늘 아침 특별열차 편으로 모두 떠났습니다.

한 발 늦었다. 김종희는 마쓰무로 부장이 거처하던 사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종희 대사 : 화약공판 진로에 대하여 물어볼 것이 많았는데 작별 인사도 한마디 나누지 못했구나.

사원 대사 : 지내인님 안 계시는 동안에 회사가 엉망이 되었어요.

김종희 대사 : 무슨 말이죠?

사원 대사 : 총무부의 강선호가 창고 안의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빼돌렸어요.

김종희 대사 : 누구보다 열심히 협조해 오기에 배신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안 했는데...

사원 대사 : 강선호에게 동조한 자들도 회사에 안나옵니다.

김종희 대사 : 조선화약공판이 망한 것도 아닌데 왜 들 그러죠?

사원 대사 : 망한 거나 같죠. 뭐, 지난 달 월급도 안 나왔고 이제 일본 사람들도 떠났으니 이번 달 월급도 없을것 아닙니까?

과연 다음날 출근한 사원은 고작 10명이 되지 않았다. 김종희는 사원들한테 호소했다.

김종희 대사 : 여러분, 나는 조선화약공판의 지배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다해 나갈 것입니다. 회사의 앞날에 어떤 난관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해방된 조국에 화약계의 등대수가 되어 이바지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끝까지 이 나라 화약계의 등대수로 꿋꿋이 남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종희의 비장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2명이 더 그만두었다. 25일은 월급 날이었다.

김종희 대사 : 남을 사람만 남았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7편 미군에 다이너마이트 공급

김종희는 남은 직원들의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시골집에서 햅쌀 10가마니를 실어 와 밀린 월급까지 정확하게 지불했다.

직원 1 대사 : 요즘 같은 혼란기에 밀린 봉급까지 주다니?!

직원 2 대사 : 나간 사람들은 후회 막심일걸?

김종희 대사 : 미군이 군용도로를 개설하고 진지를 구축하자면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할것이다.

직원 대사 : 일본인이 만들어 놓고 간 다이너마이트3.7톤이 창고에 있습니다.

김종희 대사 : 다이너마이트 3.7톤이라면 그리 많은 양은 아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저들에게 어떻게 파느냐가 문제다. 일단 부딪쳐 보기로 하자.

직원 대사 : 지배인님, 영어 잘하세요?

김종희 대사 : 손짓 발짓이라도 해야지. 헬로우, 유 노 다이너마이트?

미군 경비병 대사 : What?

김종희 대사 : 아이 해브 다이너마이드, 유 돈 노 다이너마이트?

미군 경비병 대사 : What?

김종희 대사 : 다이너마이트. 펑!펑!!

미군 경비병 대사 : 오, 마이 갓! 다이나마잇?

다이너마이트란 말에 놀란 경비병이 군수 참모실로 안내했다.

미군 장교 대사: 창고의 재고량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김종희 대사 : 언제라도 좋습니다.

다음날, 미군 지프 한 대가 사무실 앞에 섰다.

미군 장교 대사: 이쪽은 우리 공병대에서 화약을 담당하는 스미스 대위입니다.

스미스 대위 대사: 반갑습니다. 스미스 대위입니다.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김종희 대사 : 좋습니다.

스미스 대위는 공병 장교답게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의 보관 상태를 일일이 점검했다.

김종희 대사 : 지방 창고에도 있습니다. 언제쯤 돌아볼 계획입니까?

스미스 대위 대사 : 서울 화약고의 보관 상태가 양호하고 재고량도 장부와 일치하기 때문에 지방은 가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겠습니다.

김종희 대사 : 그렇습니다. 만약에 화약이 터져야 할 자리에서 터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약인은 화약처럼 항상 정확하고 정직해야 하지요.

스미스 대위 대사 : 하하하하, 유 아 라이트!

김종희 대사 : 스미스 대위, 우린 지금 사원들의 급료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미스 대위 대사 :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일주일 뒤, 그들은 전투식량을 담는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상자엔 빳빳한 새 돈으로 1만원이 들어 있었다.

스미스 대위 대사 : 보관 중인 화약의 인수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먼저 사원들의 급료를 미군측에서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1만 원은 거금이었다. 그동안 밀린 월급과 전 사원에게 50%씩 보너스를 따로 지불하니 사원들의 사기가 충전했다.

직원 대사 : 우리 지배인님 최고! 짱!

그해 12월까지 홍제동과 녹번동 화약고의 다이너마이트를 미국측에 출고했다. 그러나 출고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김종희 대사 : 곶감 빼먹듯 출고하고 창고가 바닥나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기 전에 하루속히 화약 생산을 재개해야 하는데...

김종희는 서둘러 내려가 인천화약공장의 시설을 둘러보고는 실망이 컸다.

공장 직원 대사 : 며칠 전 폭발 사고로 몇명 되지 않던 숙련공들이 모두 희생됐습니다.

김종희 대사 : 난감하구나, 화약이 바닥나면 우리의 할 일이란 미군의 화약을 우리의 인력과 시설로 관리해 주는 것뿐이다. 앞으로 영어를 모르고서는 사업하기 힘든 세상이 왔다.

김종희는 틈만 나면 영어 공부를 했다.

제8편 자주 독립의 길

1945년 12월, 남한에 대한 신탁 통치가 결정되면서 해방 이후 살얼음판을 걷던 정국은 더욱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젊은 김종희도 '자주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군중 속에 휩쓸렸다.

김종희 대사 : 울분으로 도저히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

내일이라도 당장 독립이 되는 줄 착각했던 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아직도 생생한데, 1945년은 방향조차 잡지 못한 채 격동과 혼란 속으로 저물어갔다. 해가 바뀌면서 반탁은 다시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동족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친구 대사 : 디도, 세실 주교 소식 들었나? 성공회 대성당에 다시 돌아오셨다네.

김종희 대사 : 추방당한 지5년만이야! 당장 가뵈어야지!

세실 신부를 만나러 가는 김종희는 소년처럼 설레였다. 세실 신부는 가난에 찌든 부대리 소년들의 산타클로스였다. 매월 영국 성공회 본부에서 보내주는 각종 생활용품 안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학용품과 사탕, 과자들이 들어 있었다. 소년 김종희는 배탈만 나도 세실 신부님께 달려가고 눈병이나 볼기에 종기가 나도 신부님께 달렸다.

김종희 대사 : 북일학교 다닐 때는 세실 신부님이 나누어 주는 영국제 옷과 연필, 공책으로 공부를 했지. 만일 신부님이 세운 북일학교가 없었다면 그 시절 난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몰라! 주교님!

세실 주교 대사 : 오~ 디도?

김종희 대사 :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세실 주교 대사 : 하나님께서도 디도를 반기시는군, 하하하! 이렇게 하얀 눈이 날리지 않는가. 디도?

김종희 대사 : 주교님은 지금도 눈을 좋아하시는군요.

세실 주교 대사 : 눈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니까.

세실 주교는 난로도 피우지 않은 냉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김종희 대사 : 춥지 않으세요? 제가 내일 땔감 좀 가져 오겠습니다.

세실 주교 대사 : 자네 말만 들어도 내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 같네. 그러나 내가 따뜻한 방에서 쉬노라면 조선 성공회를 재건하는 일이 그만큼 늦어질 거야.

김종희는 세실 주교처럼 배푸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며 돌아왔다. 도시는 온통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제9편 화약공장 설립의 꿈

1946년 4월28일, 김종희는 강태영 여사와 화촉을 밝혔다. 그날 결혼식을 하면서도 김종희는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미군정청이 임명하는 화약공판의 정식 관리인 자격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다가 결혼식을 위해 급히 내려왔던 것이다.

김종희 대사 : 서울에선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

신랑 집 잔칫날이었던 30일 월요일, 미군 지프 한 대가 시골의 잔치 마당에 멈추었다.

김종희 대사 : 스미스 대위!

스미스 대위 대사 : 축하합니다. 미스터킴.

스미스 대위가 결혼 축하와 함께 관리인에 내정된 소식을 전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스미스 대위 대사 : 난 고문이 되어 앞으로도 같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김종희 대사 : 아, 정말 잘됐군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3년 간에 걸쳐 시행된 미 군정이 끝나며 스미스 대위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사람이 후임으로 왔다. 광산, 토건업이 활기들 띠면서 화약 수요도 늘어났다.

김종희 대사 : 그런데 언제까지 화약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거야? 조병창으로 운영되고 있는 인천의 화약공장을 본래의 기능으로 회복시키는 길 밖에 없겠어.

김종희는 화약 국산화는 국가 경제를 살리는 데 필수 과제라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

제10편 전란 속에 지킨 화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삼팔선을 밀고 내려왔다. 지금까지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던 국민들은 하루아침에 피난민 신세가 되었다.

국방장관 대사 : 국군은 북진 명령만 하달되면 언제든지 파죽지세로 진격해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고, 밤에는 압록강에서 목욕하게 될 것입니다.

김종희 대사 : 화역고에 포탄이라도 맞으면 큰일이다. 난 그곳에 가봐야겠다.

직원 대사 : 관리인님!

김종희는 물밀듯이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헤치고 화약고가 있는 무악재로 올라갔다. 김종희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중요 서류들을 찾아서 폐기했다.

김종희 대사 : 공산당의 손에 넘어가지 전에...

미지의 인물 대사 : 문 좀 열어요! 쾅!쾅!

김종희 대사 : 누구야? 혁중이구나, 뭐하러 왔어!

권혁중 대사 : 회사 일이 궁금해서요.

권혁중은 부대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화약공판에 입사한 직원이었다.

김종희 대사 : 지금부터 우리는 화약 기술자다.

권혁중 대사 : 예?

김종희 대사 : 이제 날 관리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김 기사로 불러, 알겠지?

권혁중 대사 : 넷,관리인님!

김종희 대사 : 김 기사라니까!

권혁중 대사 : 아차, 실수.

하루는 '인민위원회'에서 내무서원이 사찰원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인민군 대사 : 동무가 여기 책임자요?

김종희 대사 : 여긴 책임자가 따로 없고 난 화약 기술자입니다.

인민군 대사 : 화약 기술자가 뭐하는 거요?

김종희 대사 : 화약고를 관리하고 폭파 현장에 나가서 사용법을 지도합니다.

인민군 대사 : 동무레 양키놈들 앞잡이 아이요?!

김종희 대사 : 앞잡이라면 벌써 피난을 갔지 왜 여기 남아서 화약을 지키겠습니까?

인민군 대사 : 좋소.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잘 보관하시라우요.

1950년9월15일, 유엔군이 참전한 인천상륙 작전이 감행되고 서울이 수복되었다.

김종희 대사 : 그럼 그렇지! 태평양전쟁에서 이긴 미군이 한낱 북한군에 패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그 해 10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권혁중 대사 :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하겠다고했답니다.

그러나 12월24일, 이 대통령은 서울 시민에게 피난령을 내렸다.

김종희 대사 : 안 되겠다. 이번에 화약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어.

12월31일 밤9시경, 외자청에서 소형 트럭 5대를 가까스로 배정받았다. 모진 추위 속에서 꼬박 이틀 동안 직원4명과 함께 홍제동 화약고의 화약을 영등포역 구내에 있는 대한통운 창고로 옮겨 놓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은 전쟁의 위험이 없었다. 전쟁은 생각보다 장기전의 양상을 띠었다. 부두에는 매일같이 증파되어 오는 미군 병력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상륙하였고 각종 군수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김종희 대사 : 그렇다! 전시 물자로 반입되는 군수용 화약의 관리를 화약공판이 맡는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당장 미군 병참기지를 찾아가 보자.

미군 대사 : 안됩니다. 사전 약속이 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

스미스 대위 : 헬로! 미스터 킴 아닙니까?

김종희 대사 : 스미스 대위!

스미스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하여 부산으로 와 근무 중이었던 것이다.

스미스 소령 : 마침 잘 됐습니다. 군수물자들이 정체되고 있어 아직 화약은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그 관리를 화약공판에서 맡아 주시오.

1951년 2월18일, 화약공판과 미8군 병참기지 사령부 사이에 화약관리 용역이 체결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종희는 한국 화약계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듬해 1952년 10월 출범하는 '한국화약주식회사'의 발판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1편 한국화약 설립과 인천공장 복구

미 8군 병참기 사령부와의 화약 관리 용역 계약으로 부산 영업소는 활기가 넘쳤다.

직원 대사 : 사장님, 대구영업소에서 추가로 화약 주문이 왔습니다.

대구는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이라 화약 수송에 나서는 직원이 없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지원자가 없으면 내가 간다.

김종희는 직접 화약을 실은 트럭 짐칸 위에 올라 대구를 내왕했다. 이즈음 영등포에 옮겨 둔 화약 60여톤이 폭격으로 창고째 날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엄동설한에 옮기느라 고생했는데 헛수고가 됐구나.

1951년 4월, 한강 이남 지역의 계엄령 해제로 영업 영역이 넓어져 화약 수요가 늘어나자 한 지인이 제안을 해 왔다.

지인 대사 : 김사장 언제까지 미군 그늘에서 화약만 가지고 씨름할 건가요?

김종희 사장 대사 : 화약이 어떻다고 그래요?

지인 대사 : 남들은 다른 걸 수입해 와 몇 곱을 남기는데, 화약 장사가 장삽니까? 우직하게 하지 말고 김 사장도 한쪽으로는 이익이 많이 남는 걸 들여와 한몫 보세요.

김종희 사장 대사 : 이 난리통에 돈 좀 벌겠다고 화약 장사를 때려치우면 누가 화약 장사를 합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만 먹을거요!

후방에 평화 무드가 일고 복구 사업이 일어나자 화약 수요가 급증했다.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공무원 대사 : 귀속 재산이 화약공장을 매각하여 민간 기업으로 육성하고 제2병 조창을 본래의 기능인 인천화약 공장으로 복원한다.

그러나 입찰이 공고되었는데도 경쟁자가 안 나타났다.

기업인 대사 : 어이구~, 그 돈이면 돈벌이가 지천에 깔려 있는데 골치 아픈 화약 장사를 누가 해!

임원 대사 : 살 사람도 없어요. 유찰시켜 싸지면 삽시다.

김종희 사장 대사 : 그냥 입찰에 응합시다. 돈만 바라보고 사업하는 건 아니잖아요? 화약계를 위해서, 또 그만큼 국방 헌금한다고 생각하자구요. 화약공판을 인수하려면 새로운 회사 법인이 필요하지 않아요?

임원 대사 : 필요 합니다!

1952년 10월9일, 김종희는 대망의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그 무렵, 화약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화약 장수는 어떤 경우에도 화약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해선 안돼요.

임원 대사 : 넷!

김종희는 가까스로 일본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1953년6월10일, 김종희는 화약공판 매수 대금의 절반(1,172만8400환)을 납부하고 화약공판 소유권을 인수했다. 그리고 자본금을 기존의 두배(1천만 환)로 증자하면서 한국화약(주)의 기반을 확충했다.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휴전이 되었다. 이제 국토재건에 필요한 화약 수요를 차질없이 공급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비서 대사 : 사장님, 상공부 장관님이 뵙자고 연락이 왔어요.

김종희 사장 대사 : 무슨 일일까?

상공부 장관 대사 : 각하께선 우리에게도 화약공장이 있는데 일본사람이 만든 화약을 쓴다는 것을 아주 부끄러워 하십니다. 김사장이 화약공장 건설에 의욕이 대단하시다는 애기를 들었습니다. 인천공장 복구를 맡아주세요.

김종희는 상공부에서 나오는 길로 인천으로 내달렸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아무 데서나 화약을 빨리 생산해 내면 된다.

공장은 문자 그대로 갈대만 우거진 폐허로 변해 있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이 화약공장을 복구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는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하는일이야말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시대적 사명으로 생각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복구를 위해서는 먼저 건설 당시의 공장 설계 도면이 있어야 한다.

수소문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인천화약공장 건설에 관여했던 후카오를 만났다.

후카오 대사 : 하마노 군이 나라께서 공장 설계도를 얻어 간 일이 있어.

김종희 사장 대사 :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후카오 대사 : 아까운 젊은이였지.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했어. 다행히 하마노 군은 그 설계도를 동경대 도서관 지하 창고에 보관해 놨다고 하더군.

김종희 사장 대사 : 택시! 동경대 갑시다.

택시기사 대사 : 손님, 거스름 돈요?

김종희 사장 대사 : 동경대 도서관이라 했지?

동경대 수위 대사 : 저 사람이? 여보쇼! 어딜가요?

김종희 사장 대사 : 혹시 고이케 경부님?

고이케 경부 대사 : 아, 역시 당신은?

김종희 사장 대사 : 김종희입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김종희 군! 일본에 와 자네가 마련해 준 돈으로 장사를 했다네, 지금은 이곳에서 수위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김종희 사장 대사 :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꿈만 같습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내가 역시 사람보는 눈 하난 정확했지. 자네가 한국 화약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줄이야. 걱정말게, 설계도는 내가 수소문해서 내일 결과를 알려 주겠네.

다음날 저녁 늦게 고이케 경부가 호텔로 찾아왔다.

고이케 경부 대사 : 지하실에서 찾아냈어. 설계도 복사본을 가져왔네.

김종희 사장 대사 : 경부님, 감사합니다.

고이케 경부 대사 : 아니네, 저 설계도가 한국 화약계에 도움이 되어 준다면 한국인에게 죄가 많은 나에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걸세.

김종희는 국내로 돌아와 설계도를 기초로 400여 페이지 분량의 복구 계획서를 작성해서 상공부에 제출했다.

이승만 대통령 대사 : 계획서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중요한 것인데 이 계획서를 만들어 낸 김종희라는 사람은 성실한 인물이오?

상공부 장관 대사 : 네, 각하, 성실할 뿐 아니라 추진력과 패기가 넘치는 청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대사 : 그렇거들랑 복구비 전액을 지원하고 내년 안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화약이 나오게 해서 장차 국방에 필요한 화약까지도 국산 화약으로 쓰게끔 하세요.

그러던 차, 장관이 교체되면서 화약공장은 임대가 아닌 한국화약(주)에 매각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상공부 장관 대사 : 단번에 복구 공사가 안되어 지속적으로 복구하자면 정부 예산으로는 한계가 있겠어요. 그러니 아예 매각하려는 겁니다.

1955년 10월26일, 드디어 한국화약(주)와 관재청 사이에 매매 계약이 체결되었다. 1995년 12월24일, 1차 복구 공사가 한 달 이상 앞당겨 끝났다. 인천화약공장 보일러의 화입식을 하자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제12편 고난 속에 이룬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1956년 4월, 다이너마이트 제조 시설 복구를 위한 2차 복구 공사가 시작되었다. 준비 작업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기 위하여 조선화학 비료공장에서 생산부장을 지낸 신현기를 과장으로 영입했다.

신현기 과장 대사 : 저 혼자만으로는 안 됩니다. 경험이 있는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조선에 기술자가 5명 있었는데 해방되던 해 폭발 사고로 2명이 죽고 3명만 남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데려다 씁시다. 그런데 월급을 터무니없는 액수인 30만 환을 달랍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신과장,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고 하거든 그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데려오세요.

인천공장장이 3만 환, 사장 월급도 5만 환 밖에 안 될 때였다. 결국 초화 작업에 참가한 경험에 따라 월급을 정했다. 이성구 23만 환(초화 작업 경력 11번) 유영수 15만 환(초화 작업 경력 7번) 이종현 10만 환(초화 작업 경력 4번)

그들은 초화 작업 진행 과정이 얼마나 위험한 작업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작업자 대사 :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닙니다. 작업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 자리에서 꽝! 우린 뼈도 못 추려요.

니트로글리세린(Nirtoglycerin)은 질산(HNO3)과 황산(H2SO4)을 혼합한 냉각 혼산과 글리세린(C3H5(OH)3)을 반응시키는 이른바 초화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강력한 폭발성 액체다.

니트로글리세린(NG)
조그만한 충격에도 폭발하는 성질이 잇어 너무 위험하여 자체로는 운반을 하거나 사용할 수가 없다. 분상(가루)의 원료들과 반죽하여 취급이 안전하도록 만든 것이 다이너마이트다.
초화공실
혼산을 반응기에 넣고 압축공기로 썩으면서 글리세린을 주입,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든다. 온도 조절을 위한 냉각시설이 필요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완벽한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

1956년 12월초, 신현기 제조 과장의 감독 하에 촤화 작업반 실습에 들어갔다.

신현기 과장 대사 : 실습에는 혼산도 글리세린도 모두 맹물로 시작합시다.

기술자들 대사 : 넷!

신현기 과장 대사 : 그럼 다시 한번 각자 임무복창!

기술자들 대사 : 글리세린 주입! 배기 가스 확인! 공기 압력, 냉각 온도 확인!

그들은 맹물로 손발을 맞추기 위해 수십차례에 걸쳐 반복 연습을 했다. 1957년 1월에는 보일러용 석탄이 대만에서 들어오고, 2월에는 황산과 질산이 일본에서 들어왔다. 그 뒤 다이너망티용 글리세린(순도 98.5%)이 들어오면서 초화 작업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최초의 시험 초화 예정일이 다가오자 인천공장에는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시험 초화의 성공 여부는 한국화약(주)의 장래와 직결된 중대사이며, 개인적으로는 작업반 세 사람의 목숨이 걸린 한판 승부였다.

1957년 5월 29일 인천화약공장 초화공실을 둘러싼 토제 위에는 초화 작업 중임을 알리는 대형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은 초화 작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게입되고 끝난 직후에 하강하게 되어 있다. 초화 작업 동안에는 전 종업원이 정숙한 가운데 초화 작업에 협조해야 하며 누구도 초화공실 주위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초화는 그만큼 위험한 작업이었다. 노벨이 처음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니트로글리세린 공정이 폭발하여 그의 동생이 사망하기도 했고 그 후에도 세계 각국에서는 크고 작은 니트로글리세린 폭발사고가 빈발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초화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신현기 과장 대사 : 50분 입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신 과장, 자신 있지요?

신현기 과장 대사 : 지금까지 실제 상황 그대로 매일 두차례씩 반복 실시했습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그렇다면 이제 진인사대천명이군요.

그날 아침 작업반 3명은 목욕재계도 했다.

신현기 과장 대사 : 마음의 준비는 다 됐습니까?

기술자들 대사 : 옛!

신현기 과장 대사 : 초화의 절대 수칙 5가지를 다시 한번 복창한다. 실시!

기술자들 대사 : 하나, 글리세린을 반응로에 주입 시 1분에 10킬로그램 내지 15킬로그램으로 한다. 둘째, 냉각용 브라인은 5도 내지 10도로 조정! 셋째, 초화 온도는 필히 17도 이하로 유지! 넷째, 작업 중 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클리세틴 주입 중지! 다섯째, 모든 것이 정상이라도 초화온도가 23도 이상 상승하면 바닥의 비상벨브를 열고 땅속의 물탱크로 약물을 몽땅 쏟아 버릴 것!

그동안 수없이 실습을 반복하며 입이 닳도록 설명해 온 초화 수칙들이었다.

신현기 과장 대사 : 자, 그럼 11시 정각에 작업을 시작해서 12시 정각에 끝내세요!

기술자들 대사 : 넷!

11시가 가까워지자 공장만은 정적에 싸이기 시작했다. 초화공실 근처는 물론이고 공장 건물 외부에도 얼씬거리는 종업원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댕 댕 댕...괘종시계가 11시를 알렸다. 숨막히는 순간이 흘렀다. 11시 30분 따르르릉...

신현기 과장 대사 : 인천공장입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나 김 사장인데 지금 초화하고 있어요?

신현기 과장 대사 : 네, 11시 정각에 시작했습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끝나는 대로 바로 전화줘요.

신현기 과장 대사 : 알겠습니다.

초화 작업이 끝나려면 아직도 2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신현기 과장 대사 : 피가 마르는군!

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11시 50분!

신현기 과장 대사 : 깃발이 걸렸나 좀 보고 오게! 가까이엔 가지말고.

기술자 대사 : 아직 걸려 있습니다.

신현기 과장 대사 : 도대체 어찌 된 거야! 헉! 12시 20분? 문제가 생긴거야? 경우에 따라서 10분이나 20분 정도 늦을순 있다.

따르르르르.....

김종희 사장 대사 : 어떻게 됐어?

신현기 과장 대사 : 사장님 아직 안끝났습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무슨 사고가 난 거 아니오?

신현기 과장 대사 : 아닙니다. 사장님!

김종희 사장 대사 : 이거 어디 피가 말라서 살겠어요?

신현기 과장 대사 : 끝나는 대로 곧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오후 1시 30분!

신현기 과장 대사 : 이 사람들 도대체 죽은 거야 산 거야?

기술자 대사 : 앗, 과장님!

신현기 과장 대사 : 도저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다.

기술자 대사 : 안돼요!

신현기 과장 대사 : 엇!

기술자들 대사 : 과장님!

신현기 과장 대사 : 어떻게 된거야?

기술자 대사 : 이제 막 끝났습니다.

신현기 과장 대사 :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기술자 대사 : 손발이 마구 떨려서 글리세린을 반응로속에 주입시킬 수가 있어야죠. 처음엔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려 그냥 내팽개치고 도망나오려고 했어요. 십년감수 했습니다. 과장님!

신현기 과장 대사 : 십년감수한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신현기는 돌아와 전화부터 했다.

신현기 과장 대사 : 사장님, 드디어 해냈습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수고했어요, 신 과장! 참말로 수고들 했어요!!

며칠 후 각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다.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성공!! 한국화약(주)는 오랜 각고의 연구 끝에 화약의 불모지에서 마침내 니트로글리세린의 제조에 성고하여...

자체 기술력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한 이래 한국화약은 1958년 3월 다이너마이트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험생산을 시작하였거, 그 해 6월 본격적인 상업생산에 돌입하여 전국의 화약수요처에 국산 화약으로 대체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제 김종희의 숙원이던 화약의 국산화로 귀중한 외화를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화약(주)는 2차(1956.4 ~ 1958.2) 및 3차(1958.5.24 ~ 1962.12.31)에 걸친 복구 작업으로 이제 국제규모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정치적 격동기였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부터 제 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전개해나갔다.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고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김종희를 찾았다. 10시 정각에 깡마른 체구의 의장이 들어섰다.

박정희 의장 대사 : 김사장님은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 하더구먼요.

김종희 사장 대사 : 네?

박정희 의장 대사 : 맥 그루더 장군하곤 친합니까?

김종희 사장 대사 : 아~ 네,맥 그루더 장군이 서울에 있을 때 가끔 만나곤 했습니다.

맥구루더 장군은 1959년 4월,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가 얼마 전에 본국의 합찹의장으로 전임된 4성 장군으로 김종희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박정희는 백악관 만찬석상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맥그루더 장군 대사 : 다이너마이트 김을 아십니까?

박정희 의장 대사 : 난 농담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김 사장이었더구먼. 다이너마이트 김, 멋있는 애칭입니다.

김종희는 이 일로 박정희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1967년 12월 초, 갑자기 박정희 대통령의 시찰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대사 : 김 사장, 경부고속도로를 곧 착공하면 고속도로 공사하다가 화약이 떨어져서 공사 중단한단 소리 안 나오게 할 자신있어요?

김종희 사장 대사 : 자신있습니다! 공장을 풀 가동하면 1년 생산량이 1만 8천톤이 됩니다. 이 물량은 일본 5대 화약공장의 총생산량의 38%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1968년 2월부터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가 시작됐고 한국화약(주)는 공사에 필수적인 화약을 차질 없이 공급함으로써 국가 경제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위험해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화약을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김종희는 우리나라가 국토를 재건하고 경제의 기반을 닦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여를 하였다. 이후 한국화약(주)의 화약산업은 산업용 화약과 방위산업, 기계항공사업을 축으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제13편 신한베아링과 한국 기계 공업 발전

베어링은 회전 기능을 지닌 모든 기계에 필수 부품이다. 1960년대 당시 신한베어링공업이 경영난으로 부도 위기에 처했다.

김종희 사장 대사 : 기계 공업은 국가와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하는데 그걸 맡을 사람이 없다니!

임원 대사 : 국내 기계 공업의 수준을 감안할 때 적어도 10년은 적자를 감수하고 투자를 계속 늘려 가야 하는 위험한 사업입니다.

임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김종희는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다'는 창업 이념을 다시 생각하면 화약 산업과는 전혀 무관한 신한베아링공업을 1964년 인수하여 한국베아링공업주식회사로 거듭나게 한다.

이후 한국베아링은 1970년대를 관통하며 기계요소 공업에서 종합 공작기계 생산업체로 발돋움했다. 또한 한국 베어링 산업의 성장을 이끌며 각종 산업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88년, 독일 FAG와 합작하여 FAG한화베어링을 설립했다. FAG한화베어링은 4.200여 종의 베어링 제품을 생산, 베어랑 부분 국내 시장 점유율 70%로 국내 최고 기업으로 성장했으며,볼베어링 세계시장 점유율 6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제14편 석유화학 에너지산업에 도전

1967년,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으로 공업화 추진을 뒤받침할 에너지의 공급 확대가 긴요했다. 한편 김종희는 여러가지 사업 영역을 총괄 지휘하기 위해 1968년 7월 1일 회장에 취임하고, 각사는 사장을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1972년 4월 경인에너지 화력발전소와 정유공장 준공식이 거행됐다. 경인에너지 준공은 그동안 한국화약이 축척해 온 기업 역량을 총 집대성 한 것으로 대한 석유공사, 호남정유 등과 함께 화려한 민간 정유 시대를 꽃피우게 된다. 경인에너지는 1970년대에 한국화약그룹을 끌어 가는 주력기업으로 자리잡았다. 1968년 3월, 한국화약은 미국 유니온오일과 화력발전소 및 간이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합작 투자 계약을 50대50의 투자 비율로 체결했다.

1969년 2월, 인천시 해안일대의 허허벌판 54만여 평의 부지 위에 하루 생산 5만5천배럴 규모의 정유공장과 발전용량 34만 4천 KW 규모의 화력발전소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그해 11월 3일, 유니온 오일과의 합작회사인 경인에너지 주식 회사를 발족시켰다.

화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발전소에 필요한 벙커C유를 자가 생산으로 공급하기 위한 간이정유 고장을 동시에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1971년 4월, 이란산 석유 22만 배럴이 율도 앞바다에 건설된 경인에너지 전용 부두에 접안하고 9월 중에는 증설 공사가 완료돼 하루 생산 6만 배럴 체재의 설비 가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1972년 4월 경인에너지 화력발전소와 정유공장 준공식이 거행됐다. 경인에너지 준공은 그동안 한국화약이 축적해 온 기업 역량을 총 집대성 한 것으로 대한 석유공사, 호남정유, 등과 함께 화려한 민간 정유 시대를 꽃피우게 된다. 경인에너지는 1970년대에 한국화약그룹을 끌어 가는 주력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플라스틱은 새로운 물질로 떠올랐다. 1968년,김종희는 앞으로 석유화학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국내 최초의 차관을 도입해 진해에 한국화성공업을 세워 석유화학공업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 시기 어려운 경영 환경 하에서도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역경을 해치며 한국화성은 한국 PVC 공업의 개척자로서의 많은 기여를 했다. PVC 제품은 국내 건축 재료, 피혁, 철강재 및 각종 일용 생산 분야에 중요한 원료로 공급되었을 뿐아니라 특히 비닐하우스(농업용필름)의 공급으로 농업 증산에 혁명을 가져올 만큼 많은 기여를 했다.

제15편 아이스크림 사업과 농촌 살리기

한국화약(주)를 토대로 국가 기간 산업 중심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던 시기인 1973년에 식품업에 진출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좀 특이하였다. 어느 날 농림부 장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농림부 장관 대사 : 김 회장님이 나를 좀 도와 줘야겠어요.

김종희 회장 대사 :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 드려야지요.

정부의 농가 소득 증대 사업의 지원으로 젖소 사육 농가가 증가했으나 소비보다 생산량이 넘쳐 매일 남는 우유가 버려진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민의 생활 형편이 우유를 마실 만큼 넉넉하지 못했던 시설이었다.

농림부 장관 대사 : 애들 학비라도 벌까 해서 빚까지 얻어 산 젖소들인데 우유값이 떨어지니 농가에선 난리랍니다.

당시만 해도 분유나 아이스크림 공장 같은 유제품 가공 공장이 없었다.

농림부 장관 대사 : 정부의 '우유먹기'캠페인도 우유를 마실 만큼 생활 형편이 넉넉지 못하니 소용이 없어요.

김종희 회장 대사 : 그렇다고 화약을 생산하는 우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농림부 장관 대사 : 미군에 아이스크림을 납품하던 대일유업이 아이스크림 공장을 짓다가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부도가 났습니다. 대일유업이 지으려던 공장만 인수하면 최소한 젖소 4천마리에서 나는 생우유를 처리할 수 있지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제품이 아닌 '하드'니'콘'이니 하는 빙과류가 호황을 누렸다. 유제품인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술도 없었고 생산 원가도 비싸서 진짜 아이스크림은 시판되는 것이 없었다.

농림부 장관 대사 : 4천 마리면 영세 농가 천가호 이상이 기르고 있는 젖소의 수량입니다.

김종희는 6.25때도 거금이 벌린다해도 소비재 장사는 안했다. 기간 산업을 일으켜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것이 김종희의 기업 목표였다.

김종희 회장 대사 : 그런 내가 먹는 장사를 할 수가 있나!

그러나 농촌의 딱한 사정에 마음이 약해졌다. 주식 50%를 인수하고 대일유업의 아이스크림 공장 건설을 떠맡았다. 1976년6월, 퍼모스트사와의 기술 제휴 기간이 끝나 '빙그레'란 상표로 출시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공급이 달리게 되어 제2공장까지 짓게 된다.

제16편 호텔 사업 진출

1970년대 서울 시내에는 조선호텔 이외에는 국제적인 규모의 숙박 시설이 없었다. 외국 귀빈들이 국내에 와서 묵으면 불편함을 호소했다.

외국 손님 대사 : 자고나면 허리가 너무 아파요. 침대가 작아 새우잠을 자야해요.

시청 맞은편에 위치한 한국 화약 사옥 자리는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에 의해 대형 관광호텔을 지어야 할 자리였다.

김종희 회장 대사 : 내가 어쩌다가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게 되었지만 어떻게 밥장사까지 하겠나!

사옥을 헐어 낸 자리에 호텔을 지을 바에야 차라리 그 터를 팔아 넘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시장 대사 : 회장님, 호텔 사업이 어째서 밥장사입니까? 외화획득을 위한 사업이라고 생각하셔야죠.

김종희 회장 대사 : 관광사업은 그쪽 전문가들이 있지 않습니까?

서울시장 대사 : 현재 우리나라에서 관광사업을 하는 사람 중에 호텔을 지을 만한 재력을 지닌 이가 없습니다. 서울의 새 얼굴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김 회장님이 번듯한 호텔을 하나 지어 주십시오.

김종희는 국가의 관광 사업을 발전 시키는 것도 사업 보국이라고 생각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이왕 지을 바엔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일류 호텔을 지을테다.

드디어 한국화약 본사 사옥이 헐리고 그 자리에 국내 제일을 자랑하는 서울프라자호텔이 1976년 10월 개관했다.

제17편 천안북일고 설립과 인재 양성의 뜻

김종희의 오랜 바람은 고등학교를 하나 세우는 것이었다.

강태영 여사 대사 : 이왕이면 대학교지 왜 고등학교예요?

김종희 회장 대사 : 내 경험을 생각해 봐도 교육은 역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고등학교 시설이 제일 중요해요.

김종희는 허물뿐인 육영사업보다는 진짜 교육사업다운 육영활동을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김종희는 부인 강태영 여사와 함께 공장을 짓기 위해 천안시 땅을 보러 나섰다.

강태영 여사 대사 : 학교 터로는 명당이에요. 저 산 이름이 국사봉이라고 했지요? 옛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국사를 길러 낼 학교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나 봐요.

김종희 회장 대사 : 하하하하, 풍수전문가가 따로 없구려!

학교법인 명칭은 김종희가 어릴 적 다니던 학교 이름을 따 천안북일학원으로 정했다. 김종희는 영국의 귀족이요, 인도 총독의 아들인 세실 쿠퍼가 가난한 부대리 마을로 부임해 북일학교를 설립하고 육영 사업에 헌실한 고마움을 항상 잊을 수가 없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세실 쿠퍼 신부를 통하여 변치 않는 신념과 좌절할 줄 모르는 용기 그리고 봉사하는 희생 정신을 배웠다.

1975년, 문교부로부터 천안 북일학원의 설립 인가가 났다. 이제 천안북일고등학교를 명문 고교로 만들기 위한 김종희의 노력과 열정이 쏟아 부어졌다. 교사들에게는 살림집을 제공하고 연간 600%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무조건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학교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집채 만한 바윗돌에 친필로 쓴 교훈을 새긴 교훈탑을 세웠다. 1976년도에는 1,200여 명의 지원자 중에서 480여 명의 합격자를 발표했다.

학생들의 교육은 김종희의 교육관이 그대로 반영된 사관학교식 전인교육이었다.

선생님 대사 : 엄격하고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행동!

김종희의 정성과 교사들의 열성, 학생들의 노력으로 1979년 제1차 졸업생 중 98%가 대입 예비고사에 합격하여 천안북일고는 신생 명문고로 떠올랐다. 1977년에 발족한 야구부와 유도부는 각종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패권을 다투며 상위권에 입상하였다. 특히 야구부는 그후로도 봉황대기 전국 야국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천안북일고가 야구 명문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제18편 그리스 명예 총영사

김종희 회장은 뛰어난 국제 감각으로 일찍이 해외 교류와 민간 외교가로 국익증대에 공헌했다. 1967년 8월부터 그리스의 명예 총영사직을 맡아 왔으며 1972년1월에는 한국과 그리스 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콘스탄틴왕으로부터 그리스의 최고명예훈장인 금성십자대훈장을 수훈했다.

제19편 기업 공개와 사업 다각화

김종희 회장 대사 : 이윤이 생기는 기업은 마땅히 공개해서 기업 이윤이 모든 국민들에게 고루 돌아가게 함으로써 건전한 국민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게 하는 것이 저의 뜻입니다.

또한 그것은 김종희의 창업 이념이기로 했다. 그해에는 미국 독립 2백 주년 축제용으로 불꽃놀이를 위한 연화를 2백만 달러어치나 수출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연화는 잔손이 많이 가고 값이 저렴해 장삿속으로 보면 수지가 맞지 않지만 까만 밤하늘을 수 놓는 오색찬란한 불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보는 이의 마을을 기쁘게 한다.

김종희는 그러한 이유로 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연화를 꾸준히 개발해 왔다. 성도증권을 인수하고 태평양건설이 대망의 중동 진출을 실현한 것도 1976년 여름이었다. 1970년대는 사세를 확장하고 사업 영역을 다각화한 의미 있는 시기였다. 김종희가 일으킨 기업은 화약을 비롯해 석유화학, 에너지, 무역, 기계, 금융, 건설, 식품, 전자 등 한국의 산업 근대화에 기여하는 대표적 기업군으로 그 역활을 다하고 있었다. 그만큼 김종희는 과중한 업무에 쫓기다 보니 자신의 건강을 꼼꼼히 챙길 겨를도 없었다.

제20편 이리역 폭발사건과 책임을 다하는 자세

착실한 성장을 이어 가던 한국화약그룹은 1977년 이리역(현재 익산) 폭발 사고라는 뜻밖의 재난을 만나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했다. 김종희는 평생 동안 독서를 좋아해서 저녁8시부터 자정까지는 서재에서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다. 1977년 11월11일 그날도 독서 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임원 대사 : 회장님, 놀라지 마십시오.

김종희 회장 대사 : 무슨 소리야. 어서 말해�!

임원 대사 : 실은, 이리역에서 화약을 실은 수송 열차가 폭발했습니다.

공장에서 경미한 사고라도 나면 늘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쿵쾅거리던 김종희였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이봐, 자세히 말해봐. 피해 상황은?

임원이 보고하는 피해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참사였다. 정환한 보고는 다음날 아침 6시에야 들을 수 있었다.

폭발한 자리에는 직경 30미터나 되는 웅덩이가 패이고 반경 2킬로미터안에 들어선 건물은 모두 날라갔습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침작하자. 이럴 때일수록 아랫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자신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어쨋든 이왕에 당한 일이니 사후 대책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세요.

임원 대사 : 예, 회장님!

김종희 회장 대사 : 오 상무는 빨리 신문에 낼 사과문을 하나 기안하게.

오상무 대사 : 회장님, 사고 원인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우리측에서 먼저 사과문을 발표할 필요가 있을까요?

김종희 회장 대사 : 이 사람아!!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했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자는 거야? 내가 부르는 대로 빨리 받아 적어!!!

오상무 대사 : 넷!

그날 중앙지 각 석간신문에 사과문이 게재되었다. 황급한 마음으로 우선 지상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1977년11월12일.

사고 원인은 호송원의 부주의로 인한 실화로 판명되었다. 그 후로 따르는 여론의 질책은 비정하리만큼 냉엄했다. "사고 책임의 소재와 응분의 책임 추궁" "관계자들의 뿌리 깊은 타성과 부주의 무관심" "무사안일주의가 빚어 낸 어처구니없는 인재" "유비무환의 뼈아픈 교훈"

김종희는 외부로부터 어떤 비판에도 겸손하게 대처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원인이야 어떻든 사고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감수하겠다. 응분의 책임을 지고 나서 다시 열심히 일해 가노라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다시 평가 받게 될 날도 오겠지.

김종희는 모든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사과문을 다시 한번 발표하였다. 그의 진심이 드러난 가식 없는 결연한 결의 그대로의 표명이었다.

행인 1 대사 : 한국화약의 김 회장은 뭔가 진정성이 있어 보이지 않나?

행인 2 대사 : 얄팍하게 위기만 모면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그의 결의 그대로 김종희가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90억 원을 피해 보상금으로 내기로 하자 재계가 경악했다.

재벌 1 대사 : 왜 그 엄청난 보상금을 한국화약 혼자서 뒤집어 쓰는거야?

재벌 2 대사 : 다른데도 과실이 있대잖아! 정부에 깎자고 해야지 원!!

재벌 3 대사 :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순진하게 다 내?!

90억 원은 재계에서 생각해 봐도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김종희는 마을을 정리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사고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고 다시 맨손으로 돌아가 떳떳하게 새 출발을 하겠다.

그러자 정부와 사회 여론이 반응을 보였다.

언론인 대사 : 피해 보상금은 꼭 받아 내야 한다! 그러나 교각살우의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기업을 도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정부는 기업을 살리고 피해 보상금도 받아 낼 수 있는 결단을 내렸다.

공무원 대사 : 한국화약은 피해 보상금 90억원을 30억 원씩 3년 분할로 납부하도록 조치한다.

당시 한국화약의 순이익은 연40억 원으로 정부는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 일을 두고 여러 평들이 등장했다.

재벌 1 대사 : 김 회장이 처신을 잘한거야, 우물쭈물하지 않고 '전부 제 책임입니다.'하고 나왔으니 사람들이 진심을 믿어준거라구.

재벌 2 대사 : 그때 김회장이 자기나 살자고 했으면 회사가 날아갔을지도 모르지!

재벌 1 대사 : 결국 살신성인의 정신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 낸 거라구.

재벌 2 대사 : 그거 김회장이 늘 부르짖던 생즉사(生卽死 살려고 하면 죽고), 사즉생(死卽生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정신 아냐?! 난 김 회장이 말로만 부르짖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후 이리시에서는 재해복구 작업이 착착 진행되어 피해 지역 위에 아파트 1,180가구가 들어서며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21편 한국 경제를 일군 불꽃 같았던 삶

사고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김종희의 의지는 다시금 사회 각계각층에 기업인 김종희와 한국화약그룹의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이리역 폭발 사고의 휴유증을 딛고 전열을 재정비한 한국화약그룹은 1970년대 말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과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장남 승연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를 계기로 귀국해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본격적인 경영 수련을 받았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이리 사고에 대한 피해 보상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을 결심이다.

김종희는 폭발 사고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는 데에 대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김승연 대사 : 잘 생각 하셨습니다. 일단 그렇게 하고 새로 시작하셔도 아버지는 틀림없이 성공하실 거예요. 저도 곁에서 힘껏 도와 드리겠습니다.

유학시설 미국으로 출장을 오면 늘 아들과 함께 머물면서 어버지 김종희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김승연 대사 : 아버지는 잘 먹고 잘살려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돈을 버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기업인이 되기를 바랐고, 아들은 훗날 아버지에 못지않은 기업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승연은 이후 태평양건설의 해외 수주 담당을 자청했다.

김승연 대사 : 아버지, 제가 해외 건설 쪽에 나가 전력투구해서 이번 위기를 만회하겠습니다.

1975년5월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있던 김승연이 1억800만 달러의 대규모 하우징 콤파운드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이처럼 한국화약그룹은 위기를 맞아 축적된 저력을 발휘하여 1979년에는 전년 대비 42.9%라는 폭발적인 신장세를 이끌어 내며 4,530억 원의 매출을 실현함으로써 마침내 재기에 성공했다. 또한 1979년에는 국내 10대 기업에 선정되었다. 이어 1980년에는 세계적 권위의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지 선정, 세계500대 기업 중 393위에 올랐다.

한국화약그룹이 대사고 이후 2년만에 권토중래하리라고는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난 2년 동안 김종희가 와신상담하며 혼신의 노력을 쏟아 온 결과였다. 그러나 그런 사이에 건강이 급격히 약해졌다.

김종희 회장 대사 : 자꾸 눈이...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고 어쩐일인지 회장실을 종일 지키는 것도 힘들구나.

김승연 대사 : 아버지!

김종희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어 갔다. 그러나 그른 입원을 한사코 마다했다.

김종희 회장 대사 : 내 건강이 안 좋다는 사실을 알리지 마라, 사업에 영향을 줄까 두렵구나.

1981년 7월23일, 사업에 혼신의 정영을 바친 김종희는 59세를 일기로 불꽃 같은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기려 기업인의 최고 명예인 금탑산업훈장을 추서했다. 김종희 회장의 영면 후 장남인 김승연 회장이 취임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화약그룹의 경영 일선에 나섰으며, 1002년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한화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한화그룹은 현재 50개의 계열사, 67개의 해외 네트워크(2010년10월말 기준)를 갖춘 한국의 대표 기업으로, 대한생명을 비롯한 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제조/건설, 서비스/레저 등 3대 사업 부문의 시너지 창출과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여러분 가슴 속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국가 사회에의 기여'는 우리가 일관해온 긍지로운 발자취이며 변할 수 없는 진로 입니다." -1980.10 창립 28주년 기념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