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화기념관

한국 화약 발전사

조선시대

▲ 조선시대의 ‘천자총통(天字銃筒)’

조선 왕조를 일으킨 이성계는 적대 세력을 견제하고 세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화약 및 화기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이 시기 우리나라의 화약과 화기 개발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태종은 선왕인 태조와는 달리 화약과 화기 개발에 처음부터 관심이 컸다. 태종은 즉위 첫해(1401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등용하는 등 화약과 화기 개발에 적극성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5년에는 화통군(火筒軍)을 400명에서 1,000명으로 다음 해에는 다시 1만 명으로 보강한 후 또 500명을 증원했다. 또 화통군과 화기가 늘어남에 따라 화약의 보유량과 성능도 현저하게 늘어났는데, 개국 초 6근 4양에 불과했던 화약 보유량은 태종 17년에 6,890근으로 약 1,000배가 넘게 늘어났다.

태종 7년에는 화약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성과도 거두었는데 태종은 연구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포상을 후하게 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9년에는 군기감본감(軍器監本監)과 화약감초창(火藥監造廠)을 신축했으며 태종 10년에는 성곽 공격용 포인 완구포(碗口砲)를 만들어 시험 발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태종 때 개발한 신종 화기는 화통, 화차, 화포, 질여포 등이 있다. 태종 말년인 18년 원단 근정문 밖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모아놓고 가진 화포 시험 발사행사에서 왜구는 물론 화약의 본 고장인 중국 사신들조차도 그 성능을 격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태종 때에는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가 성행했다. 불꽃놀이는 원래 화약이 중국에서 전래되면서 시작이 됐으나 태종 때에는 궁중에서 자주 즐겼으며 태종 13년에는 이를 연례행사로 했다고 전해진다. 화약을 사용한 불놀이는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과 질병을 쫓는다는 주술적 의미 외에도 주변의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는데 이는 화약이 군사용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상당히 사용됐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세종

조선 태종 때가 우리나라 화약 기술의 발전적 토대를 이룬 시기라면 세종조는 그 토대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매우 뜻깊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서북 변경 개척을 위해 화약과 화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또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염초의 증산 체제를 갖추었으며 새로운 염초 제조법을 중국에서 도입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화약 제조술이 왜구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반드시 관리 입회하에 염초를 제조했으며 민간의 기술적 보급을 막는 법령을 유지했다. 또 이시기에는 화약의 성능이 대폭 개선됐는데 이는 명나라의 사신이 세종 11년 찾아와 화약과 화기를 구해갈 정도로 조선 화약의 성능이 화약의 본산인 중국을 능가했으며 중국 사신들에게 베풀었던 화약 불꽃놀이 행사를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폐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화기 개발 분야에서도 천자총통(天字銃筒), 화초, 일발다전포, 소주화 등 같은 신화기를 개발하는 큰 진전이 있었다.

특히 세종 26년에 개발한 화초는 현대의 수류탄과 용도가 같은 것으로 같은 시대 유럽에서 사용된 수류탄보다 그 성능이 우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화기의 보급에도 힘써 세종 4년에는 왜구 방어를 위해 전국 연안에 화포를 설치하는 동시에 여진 정벌을 위해 서북 지방의 화기 배치를 늘려 세종 15년에 있었던 1차 여진 정벌에서 큰 효과를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종 말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화약 기술은 그간의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그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또 세종 30년(1448년)에는 그때까지 개발한 화약과 화기의 제조법을 표준화하고 그 내용을 <총통등록(銃筒謄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화약 공업이 과거 중국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기술 토대를 이룬 획기적인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종 이후 -17세기말

▲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세종 이후 17세기말에 이르는 사이 조선에서는 화약 제조에 관한 뚜렷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635년(인조 13년)에 쓰인 이서(李構)의 저서<신전자취 염초방>에는 새로운 화약 제조 공정이 설명되어 있다. 이는 군관인 성근(成根)이 실험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서가 15개 공정에 따라 서술한 것이다. 기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초석 제조의 원료가 되는 흙 중에서도 짜거나 시거나 달거나 쓴 흙이 좋은 원료가 되며 이것을 재와 오줌에 섞어 말똥으로 덮어두었다가 마른 뒤에 불에 태우며, 그 흙을 다시 잘 섞어 나무통에 담은 후 물을 붓는다. 화약을 장전 발사할 수 있게 고안된 차차의 총통기 용액을 가마에 넣고 끓이기를 세 번 한 뒤 식혀 결정시키면 화약의 주원료인 초석이 된다.”

이 책에는 흑색 화약 제조에 필요한 다음 공정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따라서 원료의 혼합 비율과 처리법은 전과 동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반세기가 지난 후인 698년 역관 김지남 등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터득한 화약 제조술을 기록한 것이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이다. 이 책은 화약 제조 공정을 10개로 나누어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재료로 사용되는 흙의 경우 과거와는 달리 짠 맛이 나는 흙은 습기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쓰지 말도록 했으며 또 다른 원료인 재도 쑥이나 볏짚을 태운 것이 제일 좋으며 소나무 재는 쓸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흙과 재를 같은 비율로 섞으며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독 안에 정자(井字)형 나무를 얼기설기 놓고 그 위에 발을 깔고 혼합한 원료를 고루 펼친 후 물을 부어 여기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가마에 넣고 끓이되 약간의 아교를 첨가하라고 나와 있다.

또 이 책은 흑색 화약 제조법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화약은 초석 1근과 버드나무 재 3량, 고운 황가루 3돈을 섞어 만들며 그 혼합량은 염초와 재와 황의 비율을 78: 15: 17로 적고 있다. 이는 오늘 날 화약을 만드는 비율 6: 1: 1의 비율과 매우 근사한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혼합물을 쌀 씻은 맑은 쌀뜨물로 반죽하고 찧어서 떡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또한 현재 흑색 화약 제조법과 비슷하다.

이 공정은 과거 제조법과 원리는 같지만 공정이 매우 간단해진 것이 특징이다. <신전자초방>의 저자는 이렇게 만든 화약은 10년이 지나도 습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원료인 흙과 재가 종전의 3분의 1밖에 들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화약의 품질이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의 화약 공업은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겪으며 화약과 화기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절감하고 그 필요성이 제기되기는 했으나 국력의 쇠퇴로 인해 실질적인 성과로 연결하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페이지 인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