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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노벨과 화약

노벨 평화상 제정

노벨은 1892년 베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 군수산업에 깊숙이 관여할수록 평화에 대한 관심도 커졌기 때문이다. 1876년 이후 사귀어 온 오스트리아의 귀족 베르타 폰 수트너(Bertha von Suttner)여사의 평화운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가 노벨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의 평화론을 피력했다.

"당신들의 공론적인 평화회의보다는 내 공장들이 더 빨리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지도 모릅니다. 두 적대국의 군대들이 똑같은 순간에 서로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한 무기가 나타나면 그때는 모든 문명국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고 앞을 다투어 군대를 해산시킬 테니까요."

그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등장하면 각국 정부가 침략행위를 삼가하거나 견제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되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화회의에 참석한 이듬해에 베르트 폰 수트너 여사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무기 제조로 번 재산의 일부를 인류의 평화를 위해 희사하겠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노벨상을 제정한다는 내용의 유서에 정식으로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서에서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우호적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효과적인 일을 한 사람, 현존하는 군대의 감축 또는 해산을 위해서 공헌한 사람이나 세계평화회의를 주선하고 발전시킨 사람에게 이 상을 수여한다.'며 노벨 평화상 수여 조건을 밝혔다.

사실 노벨이 평화상을 제정하기로 한 데는 우연도 작용했다. 1885년 노벨이 55세가 되던 때 그의 형 루드비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 신문이 노벨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제목을 뽑아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자신을 이렇게 부른 데 크게 놀라고 상심한 노벨은 유언장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오보라고 하지만 자기가 이런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노벨은 폭약이나 무기의 제조 판매로 얻은 이익을 단순히 개인이나 가족의 이익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7년에 걸쳐 3번씩이나 고쳐 쓴 유언장에서 노벨은 전쟁을 억제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한 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로 조카들인 유가족에게 남기는 유산액 때문에 고민한 흔적도 역력하다. 그러나 노벨은 유산액을 크게 줄이고 노벨상 기금으로 대부분을 남겼다.

이렇게 노벨은 전 세계의 평화상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중이 있는 상을 남기고 갔다. 그러나 평화상이 최초로 수여된 지 불과 13년 만에 일어난 세계대전으로 고성능 폭약 때문에 문명국들은 전쟁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는 노벨의 생전의 믿음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매년 수여할 예정이었던 평화상은 5년이나 지난 뒤에 국제적십자사가 두 번째로 수상했다.

이제 다이너마이트 정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무서운 무기들이 얼마든지 생산되고 있지만 전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노벨의 평화에 대한 기대는 과학자 노벨이 아니라 시인 노벨의 환상이 되고 만 셈이다.

계속된 장거리 여행과 사업에 따른 갖가지 문제 등으로 심한 두통과 우울증을 앓던 노벨은 1896년 12월10일 63세를 일기로 이태리 산모레에서 집사 한 사람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뇌출혈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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