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화기념관

화약의 기원

로저 베이컨과 '희랍의 불'

▲ 로저 베이컨(1214-1294년)

▲ ‘희랍의 불’ (Greek Fire)

흑색화약이 고대 중국의 연단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은 확실한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유럽 일각에서는 르네상스 초기에 영국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년)이 최초로 흑색화약을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로저 베이컨은 중세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회에 소속된 수도승으로 구역 교회에서 빈민구제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대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과학자였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옥스퍼드대학과 파리대학을 졸업했고, 철학을 비롯한 수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당시의 유럽을 오랫동안 풍미하던 연금술이라는 사술(詐術)에 과감히 도전해 현대과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선구자였다. 그는 신비사상에만 젖어있는 연금술을 사변적인 철학과 실용적인 화학으로 양분하면서 실험과학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는 과학이 진정한 학문으로 성립하려면 허구에서 탈피해 사실 자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이 같은 인식에 기초해 전설로만 전해 오던 고대의 소이제나 '희랍의 불(Greek Fire)'을 과학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용으로만 사용했던 발화제의 조성이나 용법은 어디에서나 비밀이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여러 가지 물질을 직접 배합하고 연소하면서 실험을 통해 조성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실험실은 항상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오랜 실험 끝에 베이컨은 발화제의 비밀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희랍의 불을 비롯한 고대의 소이제나 발화제는 가연성의 피치나 타르와 같은 물질에 생석회를 배합한 혼합물이었다.

그는 또 연구 과정에서 목탄(C)과 황(S)의 혼합물에 초석(KNO3)을 가미하면 연소성이 좋으며 이들의 배합 비율에 따라서는 폭발적으로 연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베이컨이 초석을 어떻게 구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당시의 유럽에서는 초석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동양권에서 화약의 실용화 초기에 초석 채취술이 화약 제조에 버금가는 비밀에 속하였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로저 베이컨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희랍의 불을 재현하는 초석, 황, 목탄의 세 가지 성분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종래의 발화제나 희랍의 불보다 연소성능이 뛰어난 화약을 만들어냈다. 베이컨이 만들었다는 화약에 흑색화약(Black Powder)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목탄 가루가 배합되어 있어서 혼합물의 색이 검었기 때문이다. 그가 흑색화약을 발명할 당시에는 교리와 상치되는 과학적 내용을 발표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을 뿐 아니라 이를 위반했을 때는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이 때문에 그는 실험 내용을 아무나 읽을 수 없도록 철자의 순서를 바꾼 수수께끼식 라틴어로 표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베이컨 자신이 발명한 흑색화약의 비밀과 초석의 정제법을 1249년에 저술한 <Operikus Artis et Magiao>에 수수께끼식으로 기록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페이지 인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