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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기념관

노벨과 화약

보헤미안 과학자

근대 과학기술이 화려한 꽃을 피우던 19세기 중엽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사람이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이너마이트가 새로운 생산업종으로 발돋움하면서 노벨이 거부가 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노벨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기금으로 말년에는 노벨상을 제정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도 공헌했다. 그러나 그는 군용 무연화약인 볼리스타이트를 개발했을 뿐 아니라 전쟁용 무기의 개발과 생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같은 극단적 이중성은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벨은 시적인 이상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폭약 연구에 몰두하던 무자비한 자본가였다. 한마디로 노벨의 인생은 보헤미안 과학자 그 자체였다. 그는 거주지도 일정하지 않아 한곳에서 몇 개월씩 밖에 머물지 않았다.

젊은 시절 파리의 실험실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폐쇄되자 그는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옮겨갔는데 이 이후부터는 줄곧 방랑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이탈리아, 스웨덴, 영국, 프랑스, 미국 등으로 전전하면서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의 조국은 내가 일을 하는 그 나라야. 그런데 나는 어느 나라에서나 일을 하고 있거든."

하지만 노벨이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발명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듯하다. 노벨은 폭약에 대한 자신의 집념을 순전히 기술적인 흥미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과제나 몰두하고 있는 물질이 상당히 위험하고 해악스러운 것이라는 건 잘 아네. 하지만 그저 순전히 기술적인 면에서 생각해도 너무나 재미있는 문젯거리거든. 경제적인 측면이나 돈벌이로서 수익성 사업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생각해도 다른 모든 일보다도 두 배나 더 재미가 있는 걸 어떡하나."하고 그는 친구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벨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폭약 연구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과 공장에서 보냈으며 때로는 몇 시간이고 서재에서 폭약에 관한 몽상에 빠지기도 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공장이 지어진 곳이면 어디에나 주택을 마련하고 실험실을 설치했다. 그것은 단순히 다이너마이트의 개량뿐만 아니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서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타고난 연구가였다.

다이너마이트의 발견 이외에 노벨이 발견한 것은 무수히 많다. 면 화학을 사용하는 니스나 페인트의 제조, 석유를 장거리로 수송하는 파이프라인, 니트로셀룰로오스에서 만드는 인조견사(레이온) 등 그의 관심은 광학, 기계공학, 생물학, 생리학 등에까지 이르렀으며 심지어는 수혈에 관한 연구까지 했다.

그러다가 우울증이 심해지거나 문득 돌아갈 가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며칠, 나중에는 일주일 정도씩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피하거나 실험실에서 혼자 생활했다. 그러면서도 영국의 대시인인 셸리를 대단히 좋아해 직접 시를 짓고 발표하는 낭만적인 경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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